운조루 마루에서

오늘이 동짓날인데도 아침 공기가 참 포근하다.

동네를 벗어난 차가 호남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스멀스멀 다가오는 안개가 차창을 애무하듯 감싸 안으며 스쳐 지나간다. 오른발에 힘을 주자 계기판은 어느새 시속 110km를 가리키며 차는 미끄러지듯 달리고, 곡성을 지날 무렵 밀려드는 안개가 온 세상을 순식간에 덮어버렸다.

차는 희미한 차선을 따라 느린 속도로 달리고 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온통 하얀 안개일 뿐, 앞에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도무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한 겨울, 때 아닌 안개 속을 뚫고 그렇게 도착한 곳이 구례땅이다.

앞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우리만큼 짙게 드리운 안개 속을 지나는 동안 뇌리에서는 매천 황 현 선생의 절명시(絶命詩)가 떠나지 않았다.

난리를 겪고 겪어 허옇게 센머리 된 나이가 되었네. / 삶을 잇고 죽기를 넘어선 지가 몇 번이더뇨. / 이제 어쩔 도리 없이 결심한바 이루리. / 바람 앞 흩날리는 촛불, 푸른 하늘 비치네. / 요사스런 기운이 임금을 가리며 옮겨가니 / 구중궁궐 한낮에도 어둡기만 하구나. (중략)

매천 황 현

조선 후기 우국지사 황 현을 배향한 매천사

광의면 수월리에 위치한 매천사는 우국지사 매천 황 현 선생을 배향한 곳이다.

매천 황 현(黃 玹, 2855 ~ 1910)은 세종 때의 명재상이던 황 희의 후손으로 광양시 봉강면에서 태어나 구례로 이사해 순절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황 현은 부패하고 무능한 관직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평생을 바쳤으며, 개화운동에도 일찍 눈을 떠 근대식 학교를 세웠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껴 그 동안의 경험과 견문한 바를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記聞)를 남겼다. 매천야록은 한국 최근대사의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1910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되자 국치를 통분하며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지 500년이나 되었지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 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슬프지 않겠는가”라는 말을 끝으로 1910년 8월 음독 자결했다.

사후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라 불린다. 후손과 지방 유림들이 1955년 세운 이곳 사당에는 위패와 영정이 배향되어 있고, 유물전시관과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매천 선생의 우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금환락지(金環落地) 명당의 운조루

토지면 오미리에 위치한 운조루는 하늘에서 금가락지가 떨어진 지세의 명당에 자리한 곳으로 유명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양반가옥이다. 운조루(雲鳥樓)라는 당호는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 이라는 뜻으로 중국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글귀다.

운조루는 조선 영조 52년(1776년)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冑)가 당시 99칸(현존 73칸)으로 지은 저택이다.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品字形)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조루 대문을 들어서며 고개를 들면 홍살문에 걸려있는 뼈 두 개가 보인다. 이 뼈는 류이주가 평북 병마절도사 부임길에 새재에 이르러 호랑이를 만나게 되는데, 채찍으로 그 호랑이를 잡아 가죽은 영조대왕에게 바치고 뼈는 잡귀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운조루 홍살문에 걸어 두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내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他人能解’ 라고 적힌 커다란 윈통의 쌀독이 하나 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는 ‘다른 사람도 이 쌀독을 열어 쌀을 가져갈 수 있다’는 내용이다. 흉년이 들면 굶주린 사람들에게 이 쌀독을 열어 구제했다고 한다. 또한 춘궁기에는 류이주가 생선 따위는 굽는 일이 없도록 가족들에게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이러한 류씨 집안의 가풍은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운조루를 온전하게 지탱해 내려온 힘이었을 것이다.

동편제와 국창 송만갑

남도의 판소리는 크게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눈다. 지리적으로 남원과 구례, 순창, 흥덕 등지의 동부지역에 전승돼 온 소리를 ‘동편제’, 보성과 광주, 나주 등 서남지역에 전승돼 온 소리를 ‘서편제’라 한다.

동편제는 소리가 무겁고 웅장하며 소리의 꼬리를 짧게 끊어 계면조 가락을 많이 장식하지 않는다. 반면 서편제는 소리가 부드러우며 구성진 기교가 많은 계면조 가락으로 장식한다.

송만갑 동상과 생가

구례는 예로부터 동편제의 고장으로 유명한데 ‘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송기덕’ 으로 이어지는 한 가계에서 5대에 걸쳐 명창이 배출되었다. 이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국창 송만갑이다. 그는 동편제라는 유파를 창시했다.

그는 판소리의 흐름을 개척하여 가왕(歌王)으로 불리던 증조부 송흥록, 조부 송광록, 부 송우룡 등 3대가 모두 동편제를 업으로 삼아 온 가문에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소리공부를 시작한 송만갑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스승 역할을 했다. 특히 아버지는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때에는 매질을 할 정도로 엄격한 훈련을 시켰다. 훗날 국창(國唱)의 명성을 얻었다.

그는 동편제 소리를 충실히 물려받았으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소리를 모색했다. 판소리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켜 판소리의 대중화를 선도해 나갔다.

줄풍류 전수관에서

송만갑은 동편제 소리 전통가문의 마지막 거봉으로 명창 장판개를 비롯한 김정문, 김광순, 박중근, 박봉래, 박녹주, 박초월, 김소희, 박봉술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997년부터는 송만갑 선생 추모제와 전국판소리고수대회가 매년 열린다. 구례군에서는 2000년 구례읍 백련리에 동편제 판소리 전수관과 동편제 판소리 기념관, 국창 송만갑 생가, 국악인 추모비를 건립하고 구례 동편제 판소리의 맥을 전승하고 있다,

이밖에도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구례향제줄풍류’와 ‘구례잔수농악’은 구례를 대표하는 전통문화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자투리 여행 - 압화전시관

구례 여행에서만 가능한 색다른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것이 있다. 구례농업기술센터 내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압화전시관이다.

책갈피에 넣어두었던 '압화'

압화(押花)는 꽃 등을 눌러서 건조시킨 후 회화적인 느낌으로 디자인하여 액자나 가구, 장신구 등을 만드는 조형예술이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여왕시대 궁중의 귀부인들의 장식용품에서 비롯되었다. 2층으로 된 960㎡의 전시관에는 ‘대한민국압화대전’ 국내외 수상작 등 작품 600여점과 생활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매주 월요일을 제외한 연중 관람이 가능하다. 군에서는 압화를 새로운 관광산업으로 육성·발전시키기 위해 기초반에서부터 전문가반까지 체계적인 교육을 위해 압화 아카데미도 운영하고 있다. 일반인들도 3일 전에 단체(10인 이상)로 미리 예약을 하면 평일, 주말, 공휴일 등 언제나 체험이 가능하다.

이곳에서는 압화 체험과 감상뿐만 아니라 잠자리와 지리산 곤충의 생태를 감상하고 곤충모형 만들기를 체험할 수 있는 잠자리 생태관도 있다. 야생화를 비롯한 각종 허브와 수목들로 구성된 원예치료실도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압화체험 예약 (구례군압화연구회 ☎ 010-8768-3115, 010-8642-5777)

[대동문화 92호. 2016년 1,2월호]

라규채 기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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