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중학교 교내 백일장에서 2등상을 받고 탄 상품이 시인 송수권(1940~ ) 시인의 <산문에 기대어>였다. 그로부터 30년 세월이 더 지났다. 그러나 시인은 그 첫 시집의 정서에서 한 발짝도 변화지 않은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라도 고집의 삶과 문학 세계’을 아지 고수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전라도의 고집’이란 시인의 ‘삼다 삼무’의 삶과 같은 소소한 것으로부터, 남도의 3대 정신이라는 ‘황토․대나무․뻘’의 정신으로까지 뻗쳐나가는 큰 고집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시인은 ‘담배와 커피와 낚시’를 삼다(三多)로 삼고 ‘컴퓨터와 차 운전과 신문 보지 않기’를 삼무(三無)로 삼는다.

그리고 남도 정신을 시인은 ‘황토, 대나무, 뻘의 정신’이라고 말하고 독특한 시 철학의 뿌리로 삼는다. 지리산을 시재(詩材)로 40년을 일관한 것이나, ‘나는 전라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시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하는 단호함이나, ‘남도 문화’의 뿌리에 대한 그의 집요한 탐색이 그렇다. 그리고 시인의 표정과 목소리는 시 못지않게 투깔스럽고 지리다. 천상 전라도 시인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스스로 말하는 시와 삶의 맛과 멋은 무엇인가.

시인은 미당 서정주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토속어를 발굴한 시인이다.

지릿하다는 맛을 알아야 한다. 암모니아의 그 구릿한 냄새, 즉 홍어가 잘 삭으면 코를 자극하는 지독한 냄새가 나는데 음식이 곰삭으면 이 독특한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발효 음식에서만 나는 이 독특한 냄새와 맛은 서양인의 혓바닥에는 없는 맛의 ‘영역’이다. 이 맛을 두고 우리는 ‘개미가 쏠쏠하다’라고 표현하거나 ‘그늘 있는 맛’이라고 표현한다. 이 ‘그늘’이라는 말이 판소리로 가면 ‘그늘 있는 소리’ 즉 ‘째진 목’이 아니라 ‘옹근 목(수리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삶도 폼새가 넉넉하면 ‘그늘이 있는 사람’, 시도 깊은 서정이 우러나면 ‘그늘 있는 시’라고 표현한다. ‘그늘’ 있는 맛과 시는 우리들의 영혼을 흔든다. 아니 이 ‘그늘’에서 한국인의 기질과 성품, 인성 그리고 영혼이 유전자 소인으로 각인된다 함이 옳다. 봉인된 이 언어에 시의 혼 즉 ‘대활령(大活靈)’이 숨쉬고 있다.

그늘 있는, 개미 있는 시 세계와 생명력

이 말 속에 송수권 시 세계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그늘 있는’, ‘개미 있는’ 서정을 봉인된(감춘) 언어의 혼으로 담아내어 ‘대활령’의 생명을 꿈꾸는 것, 이것이 송수권의 시 세계일 것이다. 시인의 시를 <한국문학선집>(문학과 지성사, 1900~200년) 송수권 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김소월 이후 한의 정서를 담은 전통적 서정시를 계승했으나 진솔한 삶의 숨결과 토속어의 가락을 서정적이며 생동감 있는 언어로 변화시켜낸다. 또한 민중적 역사의식을 현재 시점에서 재현해냄으로써 삶의 건강성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담았다. 그의 시는 전통적 한의 정서를 기저로 하면서도 슬픔에 매몰되지 않는 생동감을 보여준다. 역동적인 감성의 동력과 독특한 울림을 주는 서정성의 시인이다.’ 등단작「산문에 기대어」는 그 뒤의 송수권 시인의 시세계를 아우르는 서시와 같은 시이다.

누이야/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지금도 살아서 보는가/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살아오던 것을/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건네이던 것을 -「산문에 기대어」중에서-

시인은 전남 고흥군 두원면 학림마을에서 태어났다. 고흥중학교와 순천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순천사범 문예반 시절부터 시인의 꿈을 키웠는데, 서라벌예대가 주최한 백일장에서 장원을 받아 그 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특히 서정주, 박목월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75년 서른 다섯에 늦깎이로 등단한다. 「산문에 기대어」는 1974년 서울 거리를 떠돌며 떨거지처럼 산 적이 있었던 때에 문학사상사에 응모한 것인데, 이어령 편집주간이 1년 후에 시인을 찾아 등단작으로 올린 인연을 지닌 시이다. ‘쓰레기통에서 건져올린 시인’이라는 호칭을 받았다.

빨치산 투쟁을 다룬 대서사집 <빨치산>, <달궁 아리랑>은 시인의 시대정신이 그대로 드러난 명편이다.

지리산 빨리산의 역사 외면하지 않은 시대정신

첫 시집 <산문에 기대어>가 나오던 1980년은 광주 5․18이 일어났다. 《전남매일신문》에 실려 1980년 5․18을 최초로 노래한 시로 주목받은 김준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1980년 6월 2일)라는 시가 있다. 이 시보다 2일 후에 발표된 작품인 송수권의 ‘젊은 광장에서’ 《전남일보》(현. 광주일보)(1980년 6월 4일)도 의미 있는 시였지만, 이 시는 32년 만에 5․18 문학총서에 발표되었다. 이것도 시인의 고집이다.

1982년 제2시집 <꿈꾸는 섬>, 1984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시집 <아도>, 동학혁명 서사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 등도 시인의 역사의식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시편들이었다.

분수여/도청 앞 우리들의 젊은 광장에서/끓어오르는 분수여/애절한 희생자들/그들이 가고 없는 빈 골짜기의 발자국을 쓸며/새롭게 우리들 마음의 귀를 울려라/천 갈래 만 갈래 솟구치는/오늘 아침 너의 침묵은 우렁차고/너의 침묵은 우레소리와 같구나//(…)깨어나라 분수처럼/일어나라 우리들의 젊은 혼이여.//웃음과 따뜻한 사랑으로/젊은 손길 맞잡으며/나아가라, 이 젊은/아침 광장의 분수처럼 <5월 문학총서 1-시>(5․18 기념재단, 2012. 8.)

시인의 시적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동으로 지리산 남으로 섬진강 하구, 남서해안의 갯벌과 섬, 북으로 변산반도에 걸쳐 있다. 백제와 전라도의 영역이다. 자신의 시적 궤적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썼다.

나의 산책로는 지리산 속에 숨겨진 빨치산 루트와 같은 길이다. 40여 년 동안 산책길이어서 이 길 위에서 나의 문학은 탄생하고 소멸한다. 그래서 2010년 출간된 장편 서사시집은 <달궁 아리랑>이라는 표제를 달았다.(…)지리산을 울리고 간 사람들은 빨치산들이었다. 신빨치(여순사건, 14연대)의 몰락사를 원고지 700매에 담은 것이 지리산의 대서사극 <달궁 아리랑>이다.

이 산책론은 1976년에 쓴 대표작으로 치부되는 「지리산 뻐꾹새」의 울음과 한으로 먹칠된 길이다. 그리고 등단작 「산문에 기대어」는 그 2년 전에 이 길 위에서 착상된 작품이다. 정확히 말하면 노고단-심원마을-달궁 마을-반선 마을의 기나긴 우렁이 속같은 숲길이다.

근 40년 간 현대사에서 반란의 길, 역적의 길, 반역의 불온한 길을 걸으며 나의 문학도 이 길 위에서 출발된 셈이다. ‘빨치산 문학관’이 달궁 마을에 들어서는 날 이 시대의 불온문서로 치부된 내 시집도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이제 지리산이 세계 복합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날도 그리 멀지 않았으리라.

-‘내 문학의 산책길’-(시인 세계, 2011. 겨울호)

<우리들의 땅>(88),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91), <별밤지기>(92),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94) 등의 시집을 간행하면서 1995년까지 30년 간 중고등학교 교사 및 광주학생교육원 연구사로 재직하다 연구관직을 명예퇴직했다.

전업작가가 되기 위해 제주도로 가서 <남도의 맛과 멋>이라는 ‘남도 음식 문화 기행’ 책을 냈다. 남도 문화와 역사, 문화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글과 시를 쓰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1997년 초당산업대학교 강사로 임명되어 격포에 ‘어초장’이라는 초가집 집필실에 살았다.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98), <파천무>(2000)을 내고 난 뒤 2002년에 순천대학교 김길수 교수의 추천으로 객원교수에서 특채 전형으로 정식 교수가 되었다. 학사 학위도 없는 사람이 국립대 교수로 채용된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지리산을 왜 이야기하지 않는가?

산문집 <아내의 맨발>(2003)을 낸 그해 절필을 선언했다. 아내의 백일병 투병 간호 때문이었다. 2005년 <언 땅에 조선 매화 한 그루 심고>를 낸 해에 순천국립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했다. <달궁 아리랑>(2010)과 <빨치산>(2012)과 같은 서사시 외에도 우리 음식 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 <남도의 밤 식탁>(2012) 등이 시인의 후반기 시세계의 밥상 위에 맛있게 차려져 있다.

시인은 소월시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영상시 문학상, 김달진 문학상, 한민족 문화예술 대상, 만해 님 시인상, 김삿갓 문학상을 수상했고, 완도 명사십리 근처에서 방 한칸을 더부살이로 들여 광주에 들러 ‘한국 풍류문화 연구소’의 일을 보곤 다시 돌아가 낚시와 집필로 소일하고 있다.

그의 풍류론은 다음과 같다.

남도 밥상. 풍류도 밥상에서 나오며 풍(風)은 하늘이요, 류(流)는 땅이다. 이 가운데 사람이 들어가면 그것이 풍류인이다. 밥을 먹으면 그것이 한솥밥이며 들판으로 나가면 들밥이며 공동 두레판으로 뻘밭의 물을 막아 물둑을 쌓으면 그것이 개땅쇠인 개척정신 또는 물둑의 정신 또 안땅의 정신이 된다. 호남평야의 최초의 못자리인 벽골제(김제), 눌제(고부), 황등제(익산)는 이 나라 최초 3대 벼농사를 지었던 못자리였다. 이 개척 정신인 풍과 류에서 기질이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곧은 성품 죽 대쪽 같은 인성으로 발전해왔다. 이 심성(心性)이 파토스적 측면에선 멋과 맛과 한(恨) 가락으로 로고스 측면으로 가면 역사를 극복하는 역동적인 힘(부활 의지)인 의리(義理) 정신으로 발전해 왔다. 이것이 ‘검약과 절제 정신’으로 요약되는 남도 풍류(南道 風流)다. 최남선에 따르면 풍류는 원래 부여국인 우리 예맥족(濊貊族)의 ‘부루(밝다)’에서 차음된 말이라고도 한다.

그는 세상을 깨우는 목소리는 낮은 목소리라고 한다. 허풍선이들의 뻣뻣하고 새된 시를 싫어한다. 1차 감정만을 배설하는 ‘저널리즘’의 시를 싫어하고 영혼이 있는 2차 지성과 상상력이 견인된 ‘아카데미’ 시를 후배들에게 가르쳤다. 시인은 ‘시를 몸을 일으키고 마음을 일으키는, 언어로 된 힐링 체계’라고 말한다.

지리산 저 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시인의 전라도 고집은 그런 시적 삶과 전라도 정서를 견지하며 살아온 끈질긴 삶을 살아온 ‘수리성’과 ‘그늘’과 ‘울림’ 때문일 것이다. 보편과 중도의 정서로 국민들의 정서를 포괄하는 통합적 사고도 시인들에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인은 「산문에 기대어」를 쓰던 청년 시심으로 돌아가 때 묻지 않는 유장한 ‘곡선(曲線)’의 시를 쓰고 싶다고 한다. 시인은 그래서 「산문에 기대어」를 쓰던 청년 시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지리산처럼 끄떡없는 자세이다. 지리산 저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울릴 시의 세계이다.

대동문화 73호 [2012 11.12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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