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립 뿌리깊은 나무 박물관. 2011년 11월에 순천 낙안읍성 곁에 ‘뿌리깊은 나무 박물관’이 개관됐다.

1980년 마흔 네 살의 한창기(1936∼1997)는 한국 브리태니커 대표이사였다. 《뿌리깊은 나무》라는 월간 문화종합지를 1976년 3월부터 발행해오고 있었다.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의 소식을 광주 충장로에 있었던 브리태니커 광주지사로부터 자세히 전해 들었다.

잡지 기자들이 군부에 대한 항의 표시로 6월호 잡지를 휴간할 것을 제의하자 선선히 받아들여 그 다음 달 잡지가 6·7호 합병호가 되었고, 7월 31일 신군부는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의 정기간행물 172종에 대한 등록을 취소했다. 《뿌리깊은 나무》는 1980년 8월호를 내고 강제 폐간됐다.

1977년 문을 연 한국 브리태니커 ‘잎차 사업소’

1977년 《뿌리깊은 나무》 발행인이었던 한창기는 전통문화 사업부를 만들어 ‘잎차’, ‘반상기’, ‘제기’, ‘옹기’를 개발했다. 특히 전통 방법으로 만든 ‘잎차’(녹차)와 옹기로 만든 찻그릇을 보급하기 위해 잎차 사업소를 열었다. 한창기는 세일즈의 화신이었다. 판다고 마음먹으면 못 팔 것이 없었다. 브리태니커 한국지사를 설립할 정도로 사업 수완의 귀재였으며, 스스로 걸출한 세일즈맨이었으며, 수많은 세일즈 영웅들을 길러낸 사람이었다. 그 사업 수완으로 만든 전통문화 사업부였다.

세일즈 품목들은 무명, 삼베, 모시 옷, 반상기, 방짜, 반상기 등 전통문화 공예품이어서 돈을 쏟아 붓는 사업이었다. 그 사업을 동생 한상훈에게 맡겼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잎차이다. 문화 심미안을 당대를 막론하던 한창기인지라 최고의 상품으로 제작되고 디자인되었다.

우리 고유의 제다 방법인 덖고 비벼서 만드는 방법을 되살려냈다. 잎차 개발 과정에 지허 스님과 한창훈 씨가 모든 공력을 쏟았다. 1978년에는 가마금 잎차가 뿌리깊은 나무 상품으로 나왔다. ‘잎차’라는 말도 한창기가 일본 녹차와 대별해 만들어낸 말이었다. 일본에서 온 ‘다도’라는 말을 거부하면서 ‘한국에는 다도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얌전히 마시면 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잎차를 담는 차통은 작은 옹기로 했다. 그래야 숨 쉬는 그릇, 옹기 안에서 찻잎이 오랫동안 변질되지 않고 보존된다고 과학적으로 생각했다. 옹기 찻그릇을 고안하고 디자인도 화가의 그림을 받아다 넣었다. 우리 차를 고급 문화 상품으로 만들어 전통 제다법으로 최고의 디자인을 입혀 한국적 상품으로 내놓은 것이다.

‘조선식 살림살이를 현대에 재발견 해나가는’ 문화 심미안을 가진 한창기가 시대의 앞들머리에서 보여준 차문화 운동이었다. 고향 벌교 징광에 차밭을 일구어 전통 제다 방식으로 되살려냈다.

차 생활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차인연합회의 설립이 1979년 1월이었으니, 전통 차문화의 계승자로 한창기의 선구자적 역할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차를 아는 사람들도 스스로 차를 만들거나 아는 사람들끼리 나누어 즐기는 것이었을 뿐, 그것을 대중을 위한 상품으로 만든 사람은 없었다. 전라도 벌교 사람으로서 고집스런 성품과 차의 고장인 보성의 전통 정신을 이어가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뿌리깊은 박물관 전시물 중에 철제 다호가 보인다. 우리 전통차의 계승에도 앞장섰다.

징광사 전통 차맥 이은 가마금잎차

징광다원은 벌교읍 징광리 금화산 기슭의 징광사지에 있다. 징광사지는 금화산의 분지인 ‘가마금(駕馬金)’ 안에 있다. ‘가마’는 ‘정수리’, ‘꼭대기’, ‘높은 곳’, ‘신성한 자리’라는 뜻이다. ‘금’은 ‘중앙’, ‘태양’, ‘임금’이라는 듯이다. 징광사(澄光寺)는 신라 23대 법흥왕 때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영조 46년(1770) 불타 없어졌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징광의 토산품으로 차가 들어 있다. 징광사는 국내 불서 출판의 보고였다는 기록이 송광사, 선암사, 쌍계사 등의 불서에도 남아 있다. 그러니 징광은 차와 불서 출판의 근거지였다는 것이다.

이곳에 1979년 한창기의 동생인 한상훈(1998년 작고)이 징광 문화단지를 꾸민 것이다. 선암사와 지리산 화개의 야생 차나무 씨를 구해 10여 만 평에 야생차밭을 가꾸었다. 그 밖에도 전통유기, 반상기, 전통 천연염색 등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야생차밭 징광다원은 비료나 농약은 고사하고 퇴비조차도 일절 쓰지 않아서 차나무들이 잡목 잡초와 더불어 살아가며 건강한 생명력을 담고 있다. 지금은 22만평에 이르는 야생차밭인 ‘징광다원‘의 주인 차정금 씨가 유업을 잇고 있다. 한창훈 씨의 아내이다.

징광다원은 토질이 마사토와 암반층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밤의 기온차가 크고 볕과 바람이 잘 든다. 또 차나무의 뿌리는 땅속 5m 이상 뻗어내려 영양을 끌어올린다. 그래서 싱싱하고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회원 예약제로만 차를 생산하고 재고를 남기지 않는 방법으로 품질 관리를 하고 있다.

한창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2008년 <특집 한창기>라는 책을 펴냈고, 2011년 11월에 순천 낙안읍성 곁에 ‘뿌리깊은 나무 박물관’이 개관됐다. ‘토박이 문화,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살았던 한창기는 또 전통을 되살리고 문화재 수집하는 일에도 선구자였다. 장승 벼루 한복 석불 문인석 토기 자기 목가구 민화 등 컬렉션은 6400여 점이 모였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전통 계승의 문제는 조상들의 삶의 슬기를 오늘의 세계의 모든 인류의 삶에 도움이 되게 발전시키는 일이겠다. 지금 우리는 인류가 오랜 역사에 걸쳐서 끊임없이 쌓아온슬기의 축적을 내 것처럼 쓰고 있는데, 전통문화의 계승 문제는 말하자면 그런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일이 되어야 한다. -<특집 한창기> 중에서-

박물관은 기획전시실 샘이깊은물, 상설전시실 뿌리깊은나무, 세미나실 배움나무 등으로 구성됐다. 기획전시실은 한글을 사랑했던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글 창제 이후부터 대한 제국기까지의 한글 관련 자료를 전시했다. 상설전시실에는 토기와 청동그릇, 조선시대 주판, 약탕기, 문방구, 담뱃대, 안경, 목가구, 신발, 의복 등 옛사람의 일상에 관한 모든 것을 망라했다. 판소리를 사랑했던 사람답게 북 대금 소금 퉁소 단소 등 악기가 있다. 문인석 동자석 석불 석탑 등 야외 전시장의 석물도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토박이 문화,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살았던 한창기는 또 전통을 되살리고 문화재 수집하는 일에도 선구자였다. 가마금 잎차가 그것이다.

이 땅에 뿌리 둔 모든 것을 사랑한 세계인

한창기는 1937년 전라남도 보성 벌교에서 태어났다. 순천과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젊은 시절 한창기는 세련된 서구 문화를 동경했다고 한다. 그래서 법관이 되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국제회사 브리태니커의 백과사전을 팔기 시작해 한국 브리태니커의 첫 번째 지사장이 된다. 지사장 시절 그는 세일즈 신화를 일으켰다고 한다. 현대식 세일즈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업가가 된 한창기는 이제 우리 전통문화로 눈을 돌린다. 가장 애착을 가진 것은 ‘우리말’이었다. 순수 우리말을 고집했다. 토박이말을 사랑했으며, 어려운 용어를 쉬운 말로 고치려고 애썼다. 그런 정신이 발현된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깊은물》은 ‘독립신문을 창간한 이래 가장 혁명적인 한국 고유의 언론매체를 창간한 것’으로 평가됐다.

한창기는 또 현대 문화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쓰는 옛 우리말을 찾아 나서 대목장, 뗏사공, 마지막 보부상, 마지막 화전민, 진도 당골들의 삶을 기록한 <민중자서전>을 펴냈다.

아무도 국악을 거들떠보지 않았을 때 각지에 숨어있는 정통 소리꾼들을 불러 모아 판소리 감상회라는 무대를 마련했다. 100회까지 열렸던 판소리 감상회는 죽어가던 우리 소리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었다. 판소리 다섯 바탕을 음반으로 녹음하고 악보로 만들고 영문 해설까지 덧붙여 브리태니커를 통해 세계 각국에 배포했다. 여러 국악 전문가들은 판소리가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데 한창기가 가장 큰 역할을 해낸 이라고 말한다.

한창기는 또 민중들의 생활상을 기록해 종합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을 펴낸다. 아홉 개 도와 두 개의 시를 자연과 역사, 경제, 생활문화, 민속, 말, 성품 등을 엮어 열한 권의 책에 담았다.

1997년 2월 3일 저녁, 한창기는 61살의 나이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십여 년 전 가장 진보적인 문화인이자, 한국적이고 남도적인 것의 세계화를 시도했던 호남의 문화 거인, 진정한 문화 세계인이었다.

한창기 대표가 전개한 문화 사업들은 유심히 살펴보면 고향 벌교나 보성 포괄하면 남도의 토박이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차, 옹기, 반상기, 제기, 삼베, 판소리 등등…. 아! 그렇다. 한창기는 이 땅에 뿌리를 둔 한국적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자, 가장 깊이 고향 벌교를 사랑한 사람이다. 게다가 불서 간행의 가장 큰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징광사의 역사적 전통이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깊은 물》 편집 출판으로 이어졌으니, 이것은 희유한 고향의 정기 아닌가? 몸서리가 쳐진다.

대동문화 74호 [2013 1.2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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