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국사 의천 스님, 보조국사 지눌 스님과 2대 진각국사 혜심이 이곳과 차로 인연을 맺었다. 다산 정약용은 이곳에서 수많은 제다법으로 차를 만들었다. 만불차, 정차, 남차, 해남 황차, 죽전차 등을 제다해 인근에 널리 퍼졌다.

백운동 원림으로 들어가는 동백나무 숲. 그늘이 깊다.

“잉. 거그 백운동 원림 바로 아랫집이 내가 아도쳐 논 집이여. 사립문은 그냥 숟구락으로 잠가놨응께 끌르고 들어가서 함 봐봐. 옛날 누가 살다 나간 한 칸 집인디 원림이 하도 조아갔고 냉중에 작업실로 쓸 겸 해서 싼 값에 줏었어. 글고 다 보고 나와서 월출산 쪽을 함 봐봐. 어찐가?”

“그라믄 뭔 일이 생긴데요? 몸이 돌로 굳어져분다든가, 소금 기둥으로 변해분다든가 허요?”

처사이자 문인화가이신 시원 박태후 선생과의 통화였다. 나는 그 말대로 백운동 별서를 다 돌아보고, 박태후 선생의 ‘백운초당’도 들여다보고, 월출산 쪽으로 뒤를 돌아봤다. 몸이 망부석처럼 굳어질 정도는 아니더라도, 눈이 휘둥그레지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월출산 그 삐쭉삐쭉한 정수리에 바위 무더기들이 하늘 아래 도열해,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나무들 사이로 꼿꼿하다. 그 산의 절벽에 노을이 붉었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처음엔 놀랬다가 마음이 가라앉으면 ‘승처상심자애(勝處傷心自哀)’라는 말처럼 저절로 슬퍼진다.

백운동 별서 원림에서 바라다보이는 월출산 옥판봉

월출산 옥판봉 아래 감춰둔 별서 정원

그 울울한 바위 절벽들의 풍광 맨 꼭지점이 월출산 옥판봉인데 월출산 구정봉 서남쪽 정상의 봉우리이다. 강진 백운동 원림을 찾은 숱한 묵객들이 ‘백운동 12경에서도 수승한 최고 절경으로 꼽았다. 백운 별서 정원 제1경이다. ‘옥판상기(玉版爽氣)’,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이다.

백운동은 그렇게 월출산 옥판봉 남쪽 자리 명당에 자리 잡았다.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안운 마을 제일 안쪽이다. 마을 고샅길을 걸어가다가 더 이상 길이 없지 싶은 곳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원림이다.

안운마을이 끝나는 곳에 갑자기 어두컴컴한 동백나무 군락이 나타난다. 하늘을 가렸다. 조금 지나야 어둠이 익숙해진다. 백운별서의 제2경인 산다경(山茶徑) 유차성음(油茶成陰)이다. 동백나무 그늘이 깊다.

동백나무 숲에 깃을 치는 수백 마리의 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걷다보면 제4경에 도착한다. 홍옥폭(紅玉瀑)의 ‘풍리홍폭(楓裏紅瀑)이다. 동백 숲에서 계곡을 건너려면 나무다리가 있는데, 다리 아래를 포위한 큰 바위들 사이로 시내가 폭포가 되어 쏟아져 내린다. 폭포의 물이 단풍나무 붉은 빛을 바위에 되비추면 물빛이 홍옥처럼 붉다.

별서 경내로 들어서는 사람들은 정면의 작은 초당 곁을 직각으로 굽어 흐르는 아홉 굽이의 물굽이가 낯설 것이다. 제5경 ‘유상곡수(流觴曲水)’이다. 유상이란 물길 위로 술잔을 흘려 띄운다는 말이다. 시내에서 물을 끌어와 작은 수로를 냈다.

중간에 2개의 작은 연못이 있는데 첫 번째 연못에만 석가산을 쌓았다. 경주 포석정과 창덕궁에만 있는 유상곡수를 별서 속에 만들어 운치를 느끼게 했다.

유상곡수를 따라 걷다가 월출산 쪽으로 가장 위쪽에 배치된 건물이 본채인데 그 아래 취미선방이 있다. 제9경은 취미선방의 ‘십홀선방(十笏禪房)’에서 취미란 산허리를 말하고, 십홀은 아주 작다는 뜻이다. 선방처럼 작고 고요한 집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초가로 지붕을 인 3칸 집으로 세워놓았다. 사랑채의 역할을 한다.

본채에서 취미선방을 거쳐 내려가는 계단 양편에 모란을 심은 화단이 3단 마련되어 있다. 여기에 영산홍과 국화 등 화훼를 심었다. 여러 꽃 가운데 모란을 대표로 이곳의 이름을 모란체라 했다. 제8경 ‘화계모란(花階牡丹)’이다.

본채를 등지고 모란체에서 별서를 둘러보면 왼쪽 담장 밖에 대나무 숲 그늘이 아늑하다. 12경인 ‘운당천운’이다. 운당은 왕대인데 왕대밭을 운당원이라고 하고, 대밭이 구름 뿌릴 뚫었다는 뜻에서 천운이라고 했다. 푸른 대밭의 영혼 사이로 바람이 발꿈치를 들고 조심히 지난다.

강진 백운동 별서 원림은 우리 차가 중흥되는 시원지로 알려져 있다.

100그루의 매화꽃 향기가 퍼지면

이 집의 원림 조성의 백미는 아마 매화일 것이다. 제3경은 백매오(百梅塢)의 ‘백매암향(百梅暗香)인데, 본채 둘레 언덕에 심어진 100그루의 매화가 풍기는 암향이다. 눈 내린 월출산을 바라보며 그 아래 숨겨진 별서의 마당에서 100그루의 매화 가지마다 매화꽃이 절정이면, 감정 예민한 사람은 그만 그 향에 오줌을 눠버리리라. 가슴 조여서 상상하기 힘든 풍광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별서 마당에 고매는 2그루뿐이다.

본채에서 유상곡수를 지나면 모습을 드러낸 우뚝 솟은 절벽을 제6경은 청하벽의 ‘창벽염주(蒼壁染朱)라고 한다. 붉은색 글씨를 쓴 푸른 절벽이라는 뜻이다. 이곳의 아름다움을 사랑해마지 않았던 다산 정약용이 푸른 절벽에 붉은 글씨를 새겨 넣었던 바위이다. 글씨는 지금은 지워져 찾으려면 헛일이다.

제10경은 풍단의 ‘홍라보장(紅羅步障)’인데, 유상곡수 지나 창하벽 위의 단풍나무가 심어진 단을 말한다. 붉은 비단 같은 단풍나무가 마치 세상을 가려주는 커튼처럼 드리운 광경이다. 가을빛이 가장 화려할 때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정유강은 풍단 위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비스듬히 돌아 오르면 나타나는 소나무 선 산등성이이다. 정유는 소나무다. ‘유강홍린’이다. 정유는 소나무의 별칭이고 홍린은 소나무의 껍질이 용의 비늘 같아서 붙인 이름이다. 아차! 그렇게 풍경을 말하다 보니 매화, 모란, 대나무, 단풍과 같이 사계를 다 여행해버렸다.

제11경은 정선대의 ‘선대봉출(仙臺峰出)’이다. 별채 맞은편 언덕 위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정선대에 오르면 별서 정원과 월출산 옥판봉의 웅장한 자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신선조차 가던 길을 멈추고 쉬어가는 정자라는 의미다.

별서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별서 바깥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별서 안에서도 바깥 풍경은 가려져 있다. 그런데 다만 정선대에서만 별채의 전경과 제1경 월출산 옥판봉만이 조망된다. 그러니 1경과 11경이 서로 순환하고 별서 안의 풍경들이 더 부각이 된다. 절묘한 공간 배치다.

취미선방. 다산 정약용이 이 사랑채에 머물렀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남도 차 문화의 씨 퍼트려

이 백원동 별서 원림은 이담로(1627~?)가 조성해 만년에 둘째 손자 이언길(1684~1767)과 함께 들어와 살기 시작해 지금까지 13대째 이어져 내려온 공간이다. 백운동 5대 주인 이시헌(1803~1860)이 엮어 정리한 <백운세수첩>에 역대 명류들의 백운동 시를 다수 만날 수 있다.

한편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이곳을 직접 방문해 위에서 말한 백운동 12경을 읊은 시 연작을 지었다. 또 제자인 초의 스님에게 ‘백운동도’와 ‘다산도’를 그려 자신의 친필 시를 덧붙인 <백운첩>이라는 시화첩을 남겼다.

다산은 1806년 1812년 월출산 등정을 하다가 이곳 백운동에 머물렀다. 백운동의 주인 이덕휘가 그를 따뜻하게 맞았다. 이후 정을 나누다가 이덕휘의 아들 이시헌은 다산초당에서 다산에게 공부하고 사제의 정을 맺게 된다. 다산이 백운동에 보낸 편지가 여러 통 남아 있다. 1830년 해배가 된 이후 다산이 백운동의 이시헌에게 주는 편지를 이렇게 썼다.

지난번 보내준 차와 편지는 어렵사리 도착했네. 이제야 감사를 드리네. 근년 들어 병으로 체중이 더 심해져서 잔약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떡차에 힘입어서일세. 이제 곡우 때가 되었으니 다시금 이어서 보내주기 바라네.

다만 지난번 부친 떡차는 가루가 거칠어 썩 좋지가 않더군.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또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찍어낸 뒤라야 찰져서 먹을 수가 있다네. 유념해주면 좋겠네.

백운동과 차의 인연이 월출산 울울바위처럼 많기도 하다.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이곳에 들러 ‘차시’를 지었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과 2대 진각국사 혜심이 또 이곳에서 ‘차시’를 지었다.

다산 정약용은 이곳에서 수많은 제다법으로 차를 만들었다. 만불차, 정차, 남차, 해남 황차, 죽전차 등을 제다해 인근에 널리 퍼졌고, 이것은 다산이 그의 제자들에게 실학의 유풍을 남겨놓은 것처럼 오래갔다. 그래서 결국 다산, 초의, 소치 등으로 이어지는 남화와 차와 선맥과 예술의 암향이 지금껏 흘러오게 됐다.

민간 별서에서 유상곡수를 꾸민 것은 유래가 많지 않다.

강진 우리 차의 중흥 진원지

강진이 우리 차의 중흥의 진원지이고 다산이 그 중심 역할을 했다. 일제시대에는 이담로의 8대손인 이한영이 백운옥판차와 월산차를 만들었다. 최초로 품질을 표준화한 상표를 붙여 판매한 근대적 의미의 차가 생산됐다. 현재 백운동 별서 부근에는 태평양 설록다원이 조성되어 차 생산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우리 차의 문화 벨트로 강진 월추란 자락이 적격이다.

우리 차 문화가 재융성된 뿌리가 바로 이곳 강진 월출산 자락인 것이다. 차 성지에 백운동 별서의 아름다움에 월출산의 그 꿋꿋한 기상이면 바로 이곳이 신선 사는 곳이 어이 아니랴. 정원 가꾸기의 대가이기도 한 박태후 화백이 월출산에 별서 겸 화실을 만든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다만 다아(茶芽)는 이런 풍경 하나도 가지지 못했으니, 상심이다. 슬프다.

[대동문화 91호. 2015년 11,12월호]

백승현 기자, 정지승 사진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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