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뒹굴지 않는 가을 길녘을 걸어본 적 있는가. 말끔할지는 몰라도 계절의 정감이 깃들지 않은 허전한 거리일 뿐이다. 낙엽은 얼마쯤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조화석습(朝花夕拾) - 아침에 피고 진 꽃을 저녁에 줍는다.’ 중국 작가 루쉰(魯迅)의 산문집에 있는 글이다. 아침에 피었다가 떨어진 꽃을 곧바로 쓸어내지 않고 온종일 기다려 해가 진 다음에 쓸어낸다는 뜻이다. 생기 있고 화려했던 한낮과 쇠락해가는 저녁 사이에 놓인 갈등을 두루 껴안고 온 하루의 값진 의미를 찾아가는 성찰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조화석습

떨어진 꽃잎을 쓸어내 주변을 깨끗이 정돈하는 것도 좋지만, 진 꽃잎들이 뜰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모습 그대로를 즐기는 것 또한 심미안의 특권이다. 뜰의 낙엽을 쓸어내는 것은 마음에 쌓인 애환의 찌꺼기를 쓸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하루의 삶 전체를 반성적으로 성찰한 뒤가 아니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조화석습’은 대상과 관찰의 ‘거리 두기’다. 마치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녘에야 날개를 펴는 것처럼…. 황혼녘은 어떤 사실이나 현상이 끝난 뒤의 시간을 뜻한다. 지혜의 깨달음은 열정의 한낮을 지나고 명상의 황혼녘이 되어서야 찾아온다는 뜻일 게다.

미네르바의 부엉이

헤겔이 <법철학 강요>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언급한 것은 감성의 광풍이 몰아치고 지나간 뒤에 비로소 이성적 판단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상징 동물인 부엉이는 낮에는 사물을 보지 못하고 해가 진 뒤에야 세상을 볼 수 있는 주맹증(晝盲症) 환자다.

게다가 군집 생활을 하지 않고 홀로 밤의 세계를 날아다니며 개체 생활을 하는 야행성 동물이다. 부엉이의 주맹증은 역사적 사건의 폭풍우가 지나간 다음에야 뒤늦게 사건의 참 의미를 깨닫곤 하는 우리의 아둔한 역사의식과 꽤나 흡사하다. 열정의 한낮은 대중(大衆)의 시간, 명상의 저녁은 고독한 영혼의 시간이다.

개체 생활을 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대중의 감성과 고독한 이성 사이의 ‘거리 두기’다. 사실이나 현상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즉각적·감정적이어서 맹신 아니면 혐오의 양극단으로 흐르기 일쑤다.

다른 견해에는 적대적 광기를 내뿜는다. 주어진 사실과 상황 속에 자기의 주체적 자리는 없다. 감성에 휩싸인 대중만 있을 뿐이다. 객관적 상황 속에 주체적 인격으로 서기 위해서는 사실이나 현상이 야기하는 갈등과 모순을 이해하고 넉넉히 품어 안는 이성의 혜안이 필요하다.

한 발짝 물러나 삶 전체를 고요히 관조하는 인문(人文)의 눈길 말이다. 집단 지성과 집단 감성 칼라일은 ‘대중이란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와 불살라 주기를 기다리는 마른 장작더미와 같다.’고 평했다. 반면에 저명한 경영 컬럼니스트인 제임스 서로위키는 <대중의 지혜>라는 책에서 ‘평범한 다수가 탁월한 소수보다 더 현명하다. 전문가의 지식보다 대중의 지혜를 신뢰하라.’고 충고한다. 서로위키가 말하는 대중은 단순한 집단이나 군중이 아니다.

의견의 다양성, 의사결정의 독립성이 보장되고 권력의 배분과 통합 기능이 구비된 ‘집단 지성을 지닌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양성과 독립성, 권력의 분산과 통합 기능이 결여되면 대중의 집단 감성 그 자체를 절대화하는 우상 숭배로 전락한다. 유대인 수백만을 학살한 히틀러의 나치즘은 게르만 민족을 우상화한 배타적 우월주의의 병증(病症)이었다. 중국 홍위병의 문화혁명도 당시의 민중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예수의 처형 때도 그랬다. 예수를 호산나의 환호로 맞이한 유대 민중은 며칠 뒤 로마 총독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윽박질렀다. 평범한 대중은 민주 사회의 기반이다. 대중의 평범성을 무시하는 소수의 우월성은 그 자체가 비이성적 독선이며 비민주적 오만일 따름이다. 그러나 집단 지성을 갖추지 못한 대중으로 하여금 고독한 이성의 지혜를 핍박하면서 절대 가치의 주체로 나서도록 충동질하는 체제는 반문화적 우중사회(愚衆社會)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이즈음의 이념 갈등도 조화석습의 지혜가 사라지고 황혼녘의 성찰이 결여된 집단 감성의 이전투구나 다름없다.

포퓰리즘에 익숙한 정치인들이야 어차피 그러려니 하더라도, 학자나 지식인은 달라야 한다. 역사학은 인문의 바탕이 되는 학문이다. 정치인도 아니고 일반대중도 아닌 학자들이, 더욱이 다른 학문도 아닌 역사학의 전문가들이 대중의 집단감성을 부추기며 여론몰이에 열중하는 모습은 반학문적·반역사적 행태라는 질책을 피하지 못한다. 분열의 민족사, 그 반성적 성찰

역사 해석은 정치의 몫이 아니다. 대중이 표로써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해석은 사실에 구속된다. 사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해석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나 창작 설화에 불과하다.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것보다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회철학과 과학철학을 두루 섭렵한 칼 포퍼가 이성적 합리주의를 설명한 말이다. 누가 옳든 누가 그르든, 진실 앞에는 모두가 겸손해야 한다.

그것이 이성이다. 이성과 비이성의 차이를 달리 말하면 겸손과 오만, 관용과 독선, 화합과 분열의 차이일 것이다. ‘조화석습’, 아침에 떨어진 꽃을 저녁에 쓸어내는 뜻은 한낮의 열정보다 더 치열한 황혼녘의 명상에 잠기기 위해서가 아닌가. 오만과 독선에 찌든 감성의 찌꺼기를 낙엽 쓸듯 털어내기 위해서가 아닌가.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저녁 무렵에야 이성의 날개를 펴는 것은 온 하루의 반성적 성찰을 통하여 내일의 한낮을 겸손과 화합의 이성으로 맞기 위해서가 아닌가.

수백 년 오랜 세월을 줄곧 반목과 대결로 이어져온 분열의 민족사는 조화석습의 성찰도, 황혼녘의 명상도 모두 잃어버린 우리네의 부박한 집단 감성 탓이려니…. 저녁이 오고 밤이 깊어가도 좀처럼 펴질 줄 모르는 이성의 날개, 주맹증에 야맹증까지 겹친 합병증의 부엉이보다 더 슬픈 존재가 있을까.

이우근 변호사

이우근(李宇根) 변호사는 1948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경기중고와 서울 법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워싱턴 주립대 로스쿨 연구과정을 수료했고, 서울 장로회 신학대 신학과를 졸업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명예 신학박사이다.

서울중앙지법원장, 서울행정법원장, 인천지법원장, 춘천지법원장, 사법연수원 수석교수,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국회 공직자윤리위원장, 사학분쟁조정위원장, 개인정보 분쟁조정위원장 , 예술의전당 이사, 세종문화회관 감사, 언론중재위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 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법무법인 충정 고문변호사(전 대표변호사), 한국고전번역원 이사,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국가인권위원회 자문위원, 한국소아암재단 고문, 극동방송 칼럼니스트, 서울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SNO) 명예지휘자이다.

저서로 <바보가 그리운 시대>(오픈하우스), <불신앙고백>(오픈하우스), <톨레랑스가 필요한 기독교>(포이에마),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가>(행복에너지) 등이 있다. 황조근정훈장(2006), 한빛문화인상(2009), 서울언론인클럽 언론상(2012)을 수상했다.

[대동문화 91호. 2015년 11,12월호]

이우근 변호사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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