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시 월등면 문유산 기슭의 신행선원의 영명 스님은 신행회라는 불자 모임을 만들어 사회봉사 활동을 30년 넘게 펼쳐왔다.

저번 세밑에 좀 특이한 선방 한 군데를 다녀왔습니다.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골짝에 스님 혼자서 정진하고 있는 토굴인데요. 산중토굴이야 쎄고 쎘지만 폐교가 된 초등학교 건물에 차린 토굴은 흔한 게 아니지요.

전남 순천시 월등면 문유산(文儒山) 기슭에 있는 ‘신행선원(信行禪院)’이어요. 옛 월계초등학교는 월등면 산골마을 아동들이 다녔던 학교인데 여느 농촌처럼 학생들이 점차 줄어들어 결국 문을 닫았답니다. 마을과 1km가 넘게 떨어진 이 벽지 학교는 폐교가 되자마자 이내 인적이 끊겨 도리 없이 폐허가 되어갔는데요.

폐교에 차린 법당과 선방

그때 한 스님이 좋은 터가 버려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불연(佛緣)을 맺었답니다. 스님은 정재를 기울여 폐교를 인수하고 손을 모아 법당과 선방을 차렸습니다. 그 스님이 영명(靈明)스님이어요.

영명 스님은 1970년대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에게서 득도한 이래 지금까지 절집 소임은 일체 맡지 않고 오로지 참선 수행만 해온 수좌(首座)인데 자기를 위한 수행에만 머물지 않고 남을 위한 봉사도 몸소 실천해 오고 있습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대승도(大乘道)를 걷고 있는 보기 드문 본분사문(本分沙門)이라 하겠지요.

영명 스님은 일찍이 수행과 봉사가 둘이 아니라는 도리를 깨치고 1980년에 ‘신행회(信行會)’라는 불자 모임을 만들어 사회봉사 활동을 펼쳤다고 하네요. 우리나라 불교 단체에서 사회복지 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친 것이 1990년대부터이니 이 신행회의 활동은 참으로 선구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당시 전남대학교 불교 학생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30~40명이 모여 매달 나환자촌이며 양로원 고아원 소년원 등 불우 시설을 찾아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는데 그 활동을 지금까지 꾸준히 해오고 있답니다. 무려 30년 넘게 공덕을 쌓아오고 있는 셈이지요.

수행과 봉사의 불교 공동체 실현

지금 ‘신행회’는 산골 폐교에 조성한 ‘신행선원’을 둥지 삼아 수행과 봉사의 보살도를 실현해가고 있습니다. 매우 춥고 삭막한 세상에 출현한 참 따뜻한 보금자리이지요.

눈 덮인 오솔길을 허위허위 굽이돌아 산골선원에 이릅니다. 비쩍 마른 겨울산이 샛바람에 사지를 떠네요. 멧새들도 숨을 죽인 흉흉한 적막강산-. 낡아빠진 폐교의 교사만 덩그라니 을씨년스럽고요. 이런 데서 어떻게 살까, 심신이 졸지에 싸늘히 얼어붙습니다.

반가이 맞아주는 스님의 미소가 아니었으면 속인은 하마 줄행랑을 놓았을지 모릅니다. 안으로 드니 처소가 아주 정갈하고 넓고 아늑하네요. 향긋한 차 한 잔을 보시 받자 마음이 금방 훈훈해지네요.

차 맛도 선 맛도 일여합니다

-차맛이 은은합니다.

-다행이네요. 선원 주변에 차나무를 좀 심어 봤어요. 제가 틈나는 대로 품을 팔아 차 작업을 합니다.

-요즘 어떤 일을 하십니까.

-아, 동안거 결제철이라 바깥출입을 끊고 정진 중이지요.

-몇 분이나 안거하고 계신가요.

-저 혼자 하고 있습니다.

-이 너른 집에 스님 혼자 사세요? 법당이나 요사 관리는 어떻게 하시며 동자는 누가 끓이고요.

-제가 그럭저럭 해나갑니다. 평소에는 신행회 도반들이 들락거리고 가끔 뜬 손님도 찾아옵니다만 겨울 안거에 들면 산중에 사람 발길이 뜸해지지요. 혼자 지내는 게 습이 되어선지 모여 있는 거 보다 더 편하고 좋아요. 예불하고 청소하고 밥하고 산에 가고 풀 뽑고 운동장 걷고 책 보고 좌선하고 글 좀 쓰고 하다보면 하루가 살처럼 지나가지요.

-토굴에서 독살이 하면 나태해지기가 쉽다고 해서 승가에서는 곱게 보지 않는 눈도 있던데….

-저도 송광사 본사에서 대중살림 적잖이 해보았습니다만, 모듬살이건 홑살이건 저 할 나름 아니겠어요? 각기 장단점이 있을 테니 분별 둘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선현 말씀에 ‘수처작주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이란 경책도 있고요. 대중처소에 많이 머물지 않고도 혼자서 큰 법을 이루어내신 대표적인 선지식으로 법정 스님 같은 분이 계시잖습니까.

-법정 스님과는 가까이 지내셨나요.

-제가 송광사에서 머리를 깎았으니 당연히 그 분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지요. 상좌는 아니지만 틈만 나면 불일암 처소에 쳐들어가 거량을 걸고는 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제법 단기가 있다는 소리를 어른들에게 들었거든요.

법정 스님은 일상 생활에서는 엄격하고 칼칼하지만 법에 들어가서는 그렇게 자상하고 온후할 수가 없는 분이에요. 그 분 글을 봐도 그런 게 느껴지잖아요. 실은 제가 신행회를 만들고 봉사 활동에 뛰어든 것도 법정 스님의 가르침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보통 기연이 아니군요. 인연담이 궁금하네요.

-출가자는 누구나 한 번쯤 선수행이 우선인가, 보살행이 우선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게 됩니다. 자리이타라고 하지만 그 둘을 한꺼번에 병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죠. 하루는 법정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생사대사가 목전에 걸렸는데 수행을 해야 하는가, 보살행을 해야 하는가?”

스님이 일언지하에 잘랐습니다.

“생사가 무서워서 보살행을 머뭇거린다면 그런 놈이 수행을 해서 무엇에 쓰겠나?”

생사 무서워 보살행을 머뭇거려?

저는 그 자리에서 의심을 타파하고 불일암에서 몇 달 동안 이통현 장자의 ‘화엄경합론’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종교적 귀의처를 보현행원품에서 찾았습니다. 그때 공부한 결과물로 그 뒤에 <나누는 기쁨- 보현행원품>이라는 책자로 회향하게 되었어요. 법정 스님이 번역한 보원행원품 경문에 제가 해제를 단 이 책자는 우리 신행회의 지표를 제시한 이를테면 소의경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행회의 활동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내용도 알차지면서 신행회보를 발간했는데 1981년부터 2006년까지 98호를 냈어요. 재정이 어려워 근래 6년 동안 쉬었는데 다시 발간을 하기로 하고 현재 준비 중입니다.

-새해에 발원한 불사가 있으시다면.

다소 가라앉은 신행회의 활동에 다시 불을 당기기 위해 제가 그동안 틈틈이 적은 글들을 모아 시집과 수상집을 발간할 계획으로 지금 발간 작업이 한창입니다. 이 방편들이 우리 이웃의 마음밭을 갈아 부처님 자비를 심는 작은 보습이 되었으면 해요.

대동문화 74호 [2013 1.2월호]

한송주 언론인. 전 전남매일 논설실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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