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남일보 문화산책] 2019년과 2020년의 탁상용 달력이 나란히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올해와 내년의 다이어리도 함께이다. 기해년의 마지막 날들이 초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경자년의 삼백예순다섯 날은 사뭇 두려운 표정이다.

2019년의 달력에는 해야 할 일, 이미 한 일, 진행 중인 일들이 표시되어 있고, 다이어리에는 그 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날마다의 기록이 적혀 있다. 직장에서 부여받은 임무들, 사야 할 생활용품 등도 눈에 띈다. 교육과 출장 일정, 행사명과 약속 날짜, 사야할 책자 제목, 연락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 축하나 조문할 사람들의 이름도 적혀 있다.

계획은 많았고, 계획에 따라 생각했고, 일도 부지런히 했다. 그런데 때론 실수한 일도 있었고, 실패한 일도 있어 후회하기도 했다. 잘하려다가 실망스러운 결과로 이어진 인간관계도 많았다.

2020년의 달력에는 며칠만 지나면 올해라는 낱말을 사용해야 할 날짜들이 까만색과 빨간색 옷을 입고 줄지어 서 있다. 이 날짜들 위에는 또 그때그때 해야 할 임무와 계획과 실천이 잇따라 적힐 것이다.

결국 내가 살아낸 일 년과 내가 살아갈 일 년은 내가 가진 삶의 유효자원이고, 그 유효자원을 다 써버린 상실감과 새해에 대한 불안한 희망의 총합이 바로 지금의 나라고 생각해본다. 그 시간 사이에서 정말 나는 잘살고 있는 것인가?

그리스 신화에서 시간의 신은 크로노스다. 대지의 여신이 가이아이고 하늘의 신이 우라노스다. 둘 사이의 막내아들이 크로노스인데 대지와 하늘을 운행하는 원리가 바로 시간이라는 뜻이다.

시간이 흘러 운명이 된다. 그리스 신화의 운명의 여신은 3자매로, 3자매는 어둠의 신 에레보스와 밤의 여신 ?스가 낳은 자식들 중의 하나다. 노쇠, 비난, 고뇌, 애욕, 불화, 거짓말, 잠, 꿈, 죽음 등을 상징하는 신들을 어둠과 밤의 여신이 계속해서 낳는다.

신화는 상징의 문학이다. 밤과 낮이 계속되고 시간이 흐르면 우리 인간의 운명도 노쇠, 비난, 고뇌, 애욕, 불화, 거짓말, 잠, 꿈, 죽음의 과정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이다.

어둠과 밤의 신은 마지막에 3자매를 낳는데 ‘운명의 여신’이다. 맏이는 클로토로 ‘베를 짜는 여신’이고 둘째는 라케시스로 ‘나누어주는 여신’이다. 맏이가 베를 짜면 둘째는 미래의 실마리를 풀어 신들과 인간들에게 은혜를 나누어 준다. 그리고 셋째의 이름이 아트로포스, ‘거역할 수 없는 여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여신은 맏이가 짠 운명의 베를 갈라버리고, 라케시스가 나누어 준 은혜도 거두어들여 버린다. 이 아트로포스의 뜻은 제우스신조차도 거역할 수 없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는 매년 연말에 그 다음 해의 10대 문화 트렌드가 무엇이 될 것인지를 연구해서 보고서를 내놓는다. 2020년 문화 트렌드 중에는 ‘실패학, 문화적으로 응원하기’라는 항목이 있다.

내년에는 그 동안의 여러 사례가 쌓여 ‘실패를 문화적으로 응원하는’ 문화적 현상이 다채롭게 펼쳐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패 경험이 성장의 발판이 되는 사회, 다양한 실패 사례를 모아 사회 자산화하고 재기 지원 컨설팅 및 정책을 통해 재도전을 응원하는 것이다.

문화예술계에서도 완성된 프로젝트의 제출을 전제로 하지 않는 정책 지원들이 나타나고 있다. 다양한 지자체나 기관이 창작 과정의 실패나 작품 발표에 구애받지 않고 창작에 필요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광주의 문화판에 등판해서 창의적이고 독특하고 지역 사회에도 유의미한 가치를 지닌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해서 결과를 도출해내는 청년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문화 일꾼들에게 실패를 딛고 다시 재기하고 도전하는 문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실패해도 괜찮아!’ 이렇게 어깨를 두드려주고 ‘다시 도전해봐!’라고 응원해주는 정책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청년 문화 사업들은 무언가를 기획해서 사업을 성공시키고 정산을 투명하게 해서 그 사업결과 보고를 제출하라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사업을 능숙하게 이끌어나갈 경험이 부족한 그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다.

실패를 통해 더 매력적이고 창의적인 문화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광주가 돼야 한다. 그런 지원 정책도 문화 청년들이 직접 토론해 만들어보는 문화 환경도 만들어나가야 한다. 실패하면 오히려 더 지원을 강화해주고 칠전팔기로 도전할 수 있도록 응원하는 문화지원 정책이다. 정부의 ‘혁신적 포용 정책’이라는 국정 과제도, 광주시의 ‘문화수도 컬처 유토피아’의 희망도 이런 정책의 지표가 아닐 수 없다.

청년 문화인들이 광주라는 척박한 문화 환경에서도 희망을 써나갈 수 있는 한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2020년의 다이어리에 창의, 열정, 도전, 희망이라는 단어가 기록될 것이다. 운명의 여신은 그들에게 기회와 은혜를 선물할 것이다.

성슬기 기자  tmf59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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