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공연 제작사 신시 컴퍼니 박명성 대표와 소설가 조정래 씨가 만났다. 신나는 판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였다. 조정래, 그의 작품 대하소설 <아리랑>을 대형 뮤지컬로 제작해 광복 70주년을 맞는 2015년에 선보이자는 계획이다. 총 제작비로 약 60억 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질곡의 역사를 우리말로 진솔하게 표현한 그의 <아리랑>이 이제 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뮤지컬로 다른 생명을 받은 <아리랑>은 어떤 모습일까? 대하소설 <아리랑>은 1990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일보에서 연재된 후 12권의 책으로 출간된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기 한민족의 상흔과 투쟁, 이민사를 다뤘다.

김제 아이랑 문학관과 벌교 태백산맥 문학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전라북도 김제시 벽골제 부근에 조정래의 ‘아리랑 문학관’이 있다. 2003년 5월에 개관한 아리랑 문학관은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통해 김제의 역사까지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1층으로 들어서면 그가 5년 간 집필한 아리랑의 육필 원고들이 높다랗게 쌓여 있고, <아리랑>의 시각 자료와 영상 자료가 전시돼 있다.

제2전시실에는 집필을 위해 기록해 둔 그의 취재 수첩과 노트, 일상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이한 전시물로는 그가 집필을 하면서 사용한 세라믹 펜의 심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 심은 아내가 남편 영혼의 일부를 버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모아 두었다 한다. 제3전시실은 작가 아닌 인간 조정래의 면면들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리랑문학관’은 조정래의 작품 <아리랑>과 작가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살아 있는 문화 공간일 뿐만 아니라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교육의 장이다. 12년 동안 ‘글감옥’에 갇혀 살았던 그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곳이다.

벌교에는 ‘태백산 문학관’이 있다. 소설의 기록들이 빼곡하게 전시돼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무대와 보조무대, 그리고 300명에 달하는 등장인물까지 섬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한 많은 이미지들, 메모 등 집필을 준비해 나간 4년의 세월은 그에게 어떤 길이었을까?

남도 답사 일번지인 강진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소개되면서 시작된 말로 이제는 남도 답사의 고유명사가 되어버렸다. 벌교 또한 보성군 군청 소재지도 아니고 소읍에 지나지 않지만 <태백산맥>으로 인해 남도 문학 기행의 일번지가 됐다.

그것은 세밀한 소설의 힘에서 비롯됐다. 벌교에서 자란 조정래는 소설 안에 벌교를 그대로 옮겨놓았다. 지명과 건물도 그대로 소설에 사용했다. 지금도 주말이면 소설 <태백산맥>을 따라 벌교를 찾는 사람들로 벌교 중앙로의 ‘태백산맥길’은 붐빈다.

5분 먼저 일어나고 5분 먼저 행동한다

저 옛날 공중수도의 물은 아침저녁으로 서너 시간씩 찔끔찔끔 나오는 게 고작이었다. 물통 들고 뒷줄에서 기다리다 중간에 물이 끊기면 빈손으로 돌아서야 했다. 추운 겨울날 새벽 따스한 이불 속은 달콤한 유혹이지만 그 유혹을 떨치지 못해 게으름을 피우면 더 큰 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불 속에서 10분을 꼼지락거리면 수돗가에서는 1시간을 추위에서 떨어야 했다. 반대로 10분 일찍 일어나면 기다리지 않고 물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때 조정래는 깨달았다. 게으름이라는 단어를 자기 인생에서 없애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조정래 소설은 한국 문학 정신의 기둥이라 불릴 만큼 대한민국의 역사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룬 작품들이 대다수이다. 위대한 작품이 나오기까지 무엇보다 그는 남보다 5분 먼저 일어나고 5분 먼저 행동했다. 그의 생활 철학이 된 ‘5분 먼저’는 그를 이끌었다.

창살도 없고 지켜보는 간수도 없는 ‘글감옥’에서 완전한 원고를 제 시간에 생산하고 공급하려면 미리 준비하고 실천하는 자기만의 열정이 있어야 한다. 그는 평생 한 번도 원고 마감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결국 그의 모든 작품은 5분 먼저의 산물이고 그 5분 먼저의 열정은 수돗가 물지게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물지게는 조정래의 인생에서 열정으로 가는 길이었다.

소설은 인간에 대한 총체적 연구 보고서

그의 열정은 누구나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하지 못한다. 대하소설은 뒤로 갈수록 지루해진다는 게 정설이다. 글 쓰는 작가가 육체적으로 늙고 지치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쓰는 기간을 최대한 단축했다.

하루 16시간씩 일했다. 그렇게 20년 간 오직 먹고 자고 쓰는 일만 되풀이했다. 글을 쓰는 일은 물러서면 안 된다는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20년 동안 한 번도 술 마신 적이 없는 그다. 외출도 1년에 한두 번이 고작이었다.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 글만 쓰다 보니 몸에 무리가 올 정도였다. <태백산맥>을 반쯤 썼을 때 두 다리가 부어올랐다. 등이 뻐근하고 쑤시다 못해 조각조각 갈라지는 통증도 이겨야 했다. <아리랑>을 반쯤 썼을 땐 오른쪽 어깨 관절이 어긋나 팔이 마비되어 글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위궤양, 탈장도 생겼다. 맨손 체조와 산책을 하고 침을 맞아가면서 겨우 건강을 되찾아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은 글을 쓰는 사람이 더 잘 안다. 그의 부인은 시집 <사랑굿>으로 유명한 김초혜 시인이다. 동국대 국문과에서 만난 캠퍼스 커플이다. 문단의 소문난 잉꼬부부이기도 하다. 그의 부인 김초혜 씨는 남편이 쓰는 소설의 첫 독자가 되어 격려와 지지를 아낌없이 해주고 있다.

극우 세력들이 <태백산맥>을 빨갱이 소설이라고 몰아 검찰에 고발했을 때 그를 위로하고 부축한 것도 부인의 감미로운 시적 언어였다. 소설이란 “인간에 대한 총체적 연구”다. 그래서 소설을 많이 읽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진다고 말하는 소설가 조정래, 그가 만들어낸 눈들이 반짝인다.

대동문화 76호 [2013 5.6월호]

한경숙 기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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