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정태헌(59) 씨와 한국화가 곽미녀(58) 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 그것이 생활의 방편이든 아니면 자기만족이든 그것을 찾아가 일상처럼 보고 만지고 즐기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니, 그들은 언제, 어떤 계기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발견했을까? 그리고 그들은 이 발견을 어떻게 숙성시켜왔을까? 하는 물음들이었다.

정태헌 씨 부부는 그들 스스로 글을 쓴다, 혹은 그림을 그린다 하지 않는 한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부부이다. 문학을 합네, 그림을 그립네 하면서 나대거나 잘난 체 하지 않고 말도, 행동도, 눈빛도 지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금세 알게 된다. 이들이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들썩이지 않는’ 삶의 태도, 사람과 자연에 대한 통찰력과 생활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문향(文香) 속으로, 묵향(墨香) 속으로 푹~ 들어가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문학의 꿈, 그 씨앗을 품다

정태헌 씨는 광주시 동신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이다. 대학 졸업 후 세 아들의 아빠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그리고 교육자로서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는 늘 갈증을 느꼈다. 그것은 문학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그 탯줄은 숙부였다.

“내가 중학교 때 국문학과에 다니던 숙부님이 독학으로 글을 쓰겠다고 자퇴를 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골방에 파묻혀 지냈어요. 아버님의 실망은 그지없었고 어린 저도 숙부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러다 내가 고 2때인가, 숙부님이 내게 묻는 거예요. 대학에 가면 무엇을 공부하고 싶냐고…. 내가 얼른 답을 못하자 숙부님이 <분노의 포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황순원의 <단편 소설집>을 읽어보라고 주시는 거예요. 아마 그날이 내 문학의 텃밭에 처음 씨앗이 뿌려진 날이 아닌가 싶어요.”

정태헌 씨는 아버님께서 숙부님에게 걸었던 기대가 자신에게 전이되고 있음 느끼고 있었기에 문학을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숙부님이 전해준 세 권의 책은 그의 인생의 조타수가 되었다. 그가 국문학과를 지망하자 아버지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문학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당신의 동생처럼 평범하지 않는 삶을 살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을 끝까지 마치고 숙부님처럼 ‘엉뚱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엉뚱한 짓’이란 글을 쓴답시고 백수처럼 생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다. 대학을 졸업한 것과 반듯한 직업(교사)을 구해 ‘백수’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신춘문예 계절이 되면 열병을 앓았다. 몇 차례 도전을 했다. 그때 그는 알았다. 기다림이 얼마나 애를 타게 하는지. 하지만 당선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겨울의 들뜸과 새해의 좌절을 거듭하며 결국 문학은 그에게 미늘이 되고 말았다. 지쳐 발목을 빼려하면 할수록 더 깊숙이 빠져들었다.

하늘이 내려앉아 있었어요

곽미녀 씨는 전업주부였다. 20여 년 전만 해도 그녀 앞에 붙은 타이틀은 살림 잘하는 며느리, 조신한 아내, 아이 교육을 ‘똑소리’ 나게 시키는 엄마였다. 세 아들 중 첫째와 셋째는 한의학을 전공해서 한의사로 활동하고 있고 둘째 아들은 유수한 외국계 제약회사에서, 그것도 1천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여 근무 중이니 이만하면 자녀 교육에 모범 답안이라 할 만하다.

이제 그녀는 ‘한국화가 동림 곽미녀’이다. 자신만의 작업실도 마련했다. 아침에 나와 그림을 그리고 퇴근을 하듯 집으로 향한다. 문득문득, 그녀는 이 공간과 이 시간이 은혜롭고 감사하다. 비록 늦게 출발하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꿈꾸었던 그 길을 가고 있다는 충만함과 작업을 통해 무한한 평화를 얻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녀가 막연하게나마 화가의 꿈을 꾸게 된 것은 그것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한 풍경 때문이었다.

“열 살 무렵으로 기억돼요. 이른 새벽에 이웃마을로 할아버지 심부름을 가는 길이었어요. 들길, 숲길을 지나야 마을이 나오는데 가는 도중 숲속의 운무를 보고 저는 하늘이 내려앉은 줄 알았어요. 할아버지 심부름을 마치고 그 길을 되짚어 오는데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추는 거예요. 그 햇살에 이슬을 잔뜩 머금고 있는 산도라지며 나리꽃들이 반짝반짝 빛나는데 황홀했어요. 그 풍경에 반해서 해가 봉긋 떠오를 때까지 넋을 잃고 바라봤어요.”

아직은 어린, 열 살배기 아이가 운해의 신비로움을 느끼고 아침 이슬의 눈부심과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에서 황홀한 감정을 느꼈다니 그녀의 심미안과 감성이 대단하다. 그 풍경을 담아내기 위해 그녀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비교적 적었고 어머니마저 일찍 돌아가신 바람에 외동딸인 그녀는 동생에게는 어머니이자 누나로, 할아버지에게는 며느리로서, 아버지에게는 아내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다. 가족의 평화와 안위를 위해 자신의 꿈은 깊은 내면의 기도가 되었다.

평화를 그려나가는 주부 화가의 꿈

정태헌 씨 부부는 신앙(가톨릭)으로 서로의 꿈에 대한 상실감을 위로 받고 내면을 담금질해갔다.

신춘문예에서 몇 차례 낙방을 한 정태헌은 10여 년 동안 문학을 내려놓았다. 그러면서도 만년필에 늘 잉크를 가득 넣고 다녔고 그런 날에는 배가 불렀다. 의식의 세계에서는 문학을 포기했지만 무의식 세계에서는 열정을 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런 열정은 《월간 문학》을 통해 문단에 발을 들여놓게 하였다. <동행> <목마른 계절> <경계에 서서> 등의 작품집과 광주문학상, 대표 에세이 문학상, 《에세이스트》올해의 작품상 등, 수필가로서 그의 행보가 넓다. 이제 그에게 있어 문학은 ‘강 건너 등불’이 아닌 ‘손에 든 등불’이 된 것이다.

그는 작품을 함에 있어 늘 ‘수필적 마음가짐’을 견지하며 일상의 사상(事象)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일상에서 건져올렸지만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게 한다. 단어 또한 곱씹는 맛이 있다.

‘떼꾼하다, 도저하다, 갈마든다, 눈정을 나눈다, 눈맛이 소쇄하다, 짯짯이, 옴씰거리다, 입초리, 하롱하롱, 솔수펑, 아슴아슴….’ 이 말은 최근에 펴낸 <경계에 서서>에서 만난 단어다. 낯설은 그러나 엄연히 국어사전에 있는 단어를 보면서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준비와 고민과 사유를 하는지 가늠해본다.

곽미녀 씨에게 있어 어린 날 보았던 그 풍경은 자신의 삶 속에 깊게 자리하면서 미적 자산이 되었다. 곤곤한 일상 속에서도 늘 밝고 맑게 삶을 이끌며 흐트러지지 않도록 붙잡아준 것도 그날의 풍경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신앙과 남편의 지지가 보태지면서 그녀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전라남도 미술대전, 전일전 예술상(일본), 대한민국 한국화 특장전 등 국내외 굵직한 대회에서 입특선을 하였으며 현재 전남미술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 한국화 특장전 추천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또 전남도전, 대한민국 새하얀 미전, 전국 소치 미전, 아시아 미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곽미녀 씨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평화다. 하나님이 바라는 세상- 아름다운, 평화로운-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한다. 자신이 원하는 색을 얻기 위해 20번, 30번 넘게 색을 올리고 기다린다.

물건을 많이 실은 수레는 요란하지 않다고 한다. 정태헌 씨 부부의 삶은 요란하지 않다. 글을 통해 ‘갈증의 세월’을 생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속에서 평화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대동문화 77호 [2013 7,8월호]

정명혜 남부대학교 교수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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