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신철의 작품

산다는 게 무얼까. 무엇을 위해 우리는 사는가. 우리네 삶은 숨을 내쉬고 피돌기가 원활한, 1차원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긴 하나 거기에 그칠 수 없다. 인간이기에 그렇다. 누군가는 관계의 차원이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내면과 영혼의 문제 아니겠냐고 은근히 윽박질러댄다. 사는 것이 그냥 사는 것이 아니다. 떼론 무언가를 끌어안고 의미 부여를 하고 가치를 창출해야만 한다. 그런 게 삶이다. 설혹 아니더라도 흉내라도 내야 한다. 그래야 그럴 듯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그 결과 너무 심오해져 버렸다. 무겁다. 그래서 때론 버겁다. 드디어 벗어나고픈 충동까지 들기도 한다. 우와, 이것 또한 우리가 원했던 게 결코 아니었는데, 정신 차려야겠지. 어기영차.

이렇듯 좌충우돌하던 중에 만났다, 어떤 그림을. 한눈에 봐도 정말 순박한 그림이다. 아직도 이런 그림을 그리는 어른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착하고 순한’ 그림이다. 이 세상에 악은 절대로 없어요 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는 그런 그림이다. 그래 인정했다. 정말로 착하고 순하기 이를 데 없다. 한없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아, 이 느낌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태고적 순수의 경지가 아니고 무엇이랴.

기억의 끄나풀을 풀어내다

그 그림을 그린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신철이다. 오래 전에 고향 산천을 떠나간 작가다. 지금은 경기도 양평 땅에 보금자리를 틀고 한없이 그려댄다. 옛 기억의 편린들을 착하고 순한 붓으로. 그가 그리는 것은 ‘기억풀이’시리즈다. 자연과 인물이 각기 순한 자세로 자리를 잡고 메시지를 보낸다. 우리가 잃어버린 기억의 향수를. 애써 눌러놓았던 옛 기억의 편린들을 욕망의 기름기를 싹 걷어치우고 순수 덩어리로 마주 대하게 한다. 정신이 번쩍 든다. 그래, 그랬었지. 내가 거기에 있었고,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하는 자조 섞인 감정이 서슬 퍼렇게 자리를 잡은 뒤 점차 가슴을 차분히 진정시킨다. 그이의 그림은 복잡다단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그런 청량제 같은 역할을 한다.

딱 봐도 어린 시절 영희와 철수임직한 아이가 등장한다. 앞머리를 뚝뚝 자른 단발머리 소녀와 까까머리 소년이 등장하는, 해학적이고 소박한 형상미로 도배질 쳐진 그림이다. 그는 어쩌자고 이런 그림을 그릴까. 한때 그도 무겁게 그렸다. 심오한 의미를 빵빵하게 담아서. 그러다 다 뒤집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그림이 기억풀이시리즈다.

“나가 있었더니 고향의 모습이 선연히 떠올랐습니다. 만약 떠나지 않고 이곳에 남았었더라면 글쎄요...”

기억풀이시리즈는 순전히 전라도 촌놈이 전라도를 떠남으로 해서 자연스럽게 저 밑바닥으로부터 차고 올라온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빚어진 소재라는 것이다. 신철은 우리가 잊고 사는 기억의 저편의 것을 끄집어내어 아무렇지도 않게 화면에 풀어헤친다. 조형적인 세련미도 테크닉도 모두 없다. 그저 기억의 끄나풀들을 얼기설기 풀어내었을 뿐이다. 다만 축약을 통해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그득하다. 거기에 신철 그림의 묘미가 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고향, 고향 내 고향을 캔버스에

신철의 고향은 푸른 파도 넘실대는 뱃길을 따라 한참을 난바다로 나가야 하는 완도 청산도다. 요즘이야, 청산도가 슬로시티니 뭐니하는 바람에 서울사람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지만 옛날이야 그러질 못했다. 같은 전라도에서 생각해도 참으로 멀고 먼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나고 자랐다. 살짝 광주바람을 쐬기 했지만, 초등학교 성장기에 그는 거기서 보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에 의해 길러진 그는 혼자 몸으로 살아야 하는 어머니가 도회지에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기에 동생과 달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는 고향 청산도에서 외로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항시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어린 소년, 육지로부터 오는 뱃길을 바라보며 애타게 기다림을 되풀이해야 했다. 몸서리쳐지는 그리움과 외로움, 그리고 고단함. 그것들에게서 그는 탈출할 수 가 없었다. 벗어날 수 없었던 고통이 지금 와선 아련한 감정이고 아름다운 것은 아이러니 아닐까. 물론 사람은 자신의 경험 이상의 것을 넘나든다. 직접 겪지 않고도 상상하고 미뤄 짐작하고 관념의 세계를 엮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보고 겪는 것 이상 크게 작용하는 것이 없다. 오죽 했으면 ‘백문이불여일견’이라 했을까. 그 기억 저편의 편린이 어느 날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것을 형상화했다. 보는 사람 모두의 심금을 가볍게 저미는, 그런 감성의 그림들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놓는다. 그리고 가슴 쏙쏙 전해준다.

삶과 예술의 일체화

삼십년 넘게 지속되온 그의 창작은 그야말로 새로움의 연속이다. 그가 제작한 모든 작품은 관객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처음인 그림이다. 안정보다는 변화를, 익숙함보다는 새로움을 갈구하는 열정이 그의 작품세계를 오늘에 이르게 했다. 그는 원래 비구상을 취급했다. 당시 모두가 휩쓸려가는, 천편일률적인 인상주의 풍에 매몰되기가 싫었다. 이른바 회화의 언어와 a문법에 몰두했던 순수조형미에 대한 탐구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형상을 좇지 않았다. 전라도에 있을 땐 적어도 그랬었다. 그런 그가 전라도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떠났었다. 사나이로 태어나 뭔가를 해야 하지 않나하는 그런 짱장한 각오로. 그리고 거기서 그는 이런 저런 그림을 섭렵하다가 시각적 유머와 위트가 돋보인 ‘회화적 표현의 확장’시기를 거쳤다. 이 기간에 제작된 작품은 회화의 내재적 가치로서 질감, 색채, 재료, 기호, 상징 등의 조형언어가 감상자들을 자유로운 상상의 유희로 이끈다.

5,6년 전 이쪽저쪽부터 의미 있는 변화가 일었다. 신철이 작품에서 맥락을 중시하면서 이미지 변형, 공간 구성에 있어 일상세계와의 조우를 시도한다. 삶과 예술의 일체화가 드러났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고향의 정서를 고스란히 그림에 담아냈다. 그의 그림엔 청산도에서 길러낸 자연의 정서가 담뿍 담겨있고 진한 사람냄새가 난다. 자연과 사람이 어느 한쪽이 기울지 않고 동일한 가치로 살아나는 것도 그의 그림이 갖는 특징이다. 결코 한쪽이 부각되지 않는다.

그는 소위 잘 나가는 작가군에 속한다. 여기저기서 전시회를 하자는 청이 많이 들어온다. 그걸 다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잘 나간다. 그렇게 설명하면서 “끙!” 신음 소릴 내뱉는다. 비위에 맞질 않는 소릴 했으니 속이 뒤집어지는 게다. 겉보기엔 우락부락하나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을 지닌, 그런 작가다. 어찌됐건 잘 나가는 걸 무엇으로 막으랴.

3월8일부터 5월9일까지 전주 오스갤러리에서 ‘봄날의 외출’이란 타이틀 아래 개인전을 갖는 것에 이어 곧바로 5월16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인사동 리서울갤러리에서 ‘꽃잎이 피면’이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을 예정해두고 있다. 쉴 틈 없이 작업을 할 수 밖에 없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붓질

사실, 그의 작업의 시원은 열등감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에도 모두가 다 자연스럽게 하는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을 하지 못했었다. 우연히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림 그리기대회에서 상을 받은 이후 재능이 있는 줄 알고 덤볐다가 만만치 않았다. 대학도 지방에 겨우 들어가 허우적거리다 서울이랍시고 올라가서 그곳에서 또 허우적거렸다. 그래도 대학2~4년 때 그림에 빠져 지낼 때가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니었나 싶다. 열등감의 지배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실패라는 자괴감에 의해 다음 그림을 재촉하게 되고 되풀이 과정 속에서 그림이 늘어가는 것 아니겠냐는 거다.

“아마도 이곳에 계속 있었더라면 자연의 소중함도, 옛 기억의 편린도 찾아내질 못하고 버둥거렸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떠나 있었기에 소중함과 절실함을 가질 수 있었을 거라고.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는 그에게 그 소중한 것은 무얼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란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한 순간 한 순간이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이걸 어떻게 요리하느냐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그에게도 후회되는 게 있다. ‘인문학’에 대한 갈증이다. 그 때 그 때 섭취했어야 할 인문학적 고전들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에 씹어 먹었어야 했을 ‘데미안’ ‘죄와 벌’ ‘전쟁과 평화’ 등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술과 담배에 찌들어 ‘의리’만을 외쳤던 그 시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오그라든다. 그걸 절실하게 느껴오던 터라 책에 대한 집착은 있는 편이다. 그러함에도 작업에 방해가 될까봐 호흡이 긴 소설류 등의 책은 쉬이 잡지 못하고 시집류는 어딜 가든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틈틈이 꼽씹으며 읽는다. 이번 광주나들이에도 김정옥시집을 들고 왔다.

관객들이 보기에 쉽고 친근한 그림, 그러나 작가가 그렇게 그리기엔 그리 수월치 않다. 고심의 흔적이 여기저기 엿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나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그가 고민하고 압축해가는 시간들은 그의 창작품들이 농익어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작품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그는 때때로 깊은 사색의 세계로 빠져든다. 때론 바늘 끝 신경으로 오도돌 떨기도 하며 때론 광활한 우주로 자유유영을 떠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얼핏 쉬워 보이는 그의 형상들은 관객들 가슴팍으로 다가든다.

사진=최옥수 사진국장

[대동문화 69호, 2012년 3. 4월호]

김영순 광주문화재단 홍보교류팀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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