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아는 듯싶다가도 헷갈리기도 하고 아예 오리무중 헤매기도 한다. 작업 중에 그럴 때가 오면 정말 미칠 일이다. 뭔가를 그린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자신이 무얼 그리려고 했는지, 아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알 수조차 없을 때 답답함은 하늘을 찌른다.

작가 정산 백현호 역시 그랬었다. 아니 그에겐 같으면서도 다른 심정이었다. 아예 모르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그 길을 가지 못하는 갑갑함이었다. 자신이 무얼 하고 싶은지 명백히 아는데도 그걸 접고 다른 걸 해야 하는 처지가 가슴에 피멍 들도록 슬펐다.

이게 아닌데…, 뻔히 그게 아닌 걸 알면서도 아닌 것을 그려야 하는 심정은 복잡다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때론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아픔이었다. 그러길 무려 수십 년. 과감히 결단을 내렸다. 도저히 이렇겐 안 되겠다고 결연히 떨쳐 일어나 일을 저질렀다. 그리고 마구 휘둘러댔다. 어찌나 마음이 개운하던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수묵산수의 고답적인 그림에서 빠져나오다

2008년의 일이었다. 자신의 화풍을 확 바꿔버린 일대 사건은 그 때 그의 개인전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모두들 깜짝 놀랐다. 30여 년 간 굴려왔던 수레바퀴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새로운 화풍이 화폭에 펼쳐지게 된 것을 알아차린 것은 정말 쉬운 일이었다. 바꿔도 너무 확 바뀌었기 때문이다. 모방과 재현을 착실히 아니 답습해왔던 작가 백현호가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진경산수라 할 수묵 산수에 무려 30년이란 세월을 머물러 있었던 그가 수묵산수의 고답적인 그림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화풍을 전개했다.

당시에 취재를 위해 작업실을 찾았던 필자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느냐고.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를 내저었다. 자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작업을 해 왔지만 발표도 미뤘고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미뤄왔다고 고백했다. 순전히 먹고 사는 문제 때문이었다.

수묵산수에 대한 수요가 많은 그림 시장에서 추상과 비구상이 뒤섞인 그림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과 그릴 수밖에 없는 그림 두 가지 종류를 따로따로 그려왔었노라고 말했었다. 얼마나 붓을 휘젓고 싶었는지,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다북다북 그려야 했던 심정을 보듬어 안고 붓질을 해야 했었노라고 말했었다.

이번 취재 차 들렀던 작업실에서 화가는 5년 전보다 훨씬 자유스러워졌다. 달라진 게 다면 힘이 많이 빠져 보인다는 거. 수년 전 자전거를 타고 가도 순간적인 인지 멈춤 현상에 의해 크게 다쳤었던 후유증이었다. 그래도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거침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움직임이 온 몸에서 솟구쳤다.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이란 이름으로…

그의 작품을 보노라면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이 떠오른다. 예술의 종말이 선포된 이후에도 일군의 작가들은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을 보란 듯이 행해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새 시대의 비전을 거리낌 없이 보여준다. 대중은 다소 생소한 예술 언어를 때론 찡그리고 때론 맛나게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은 그렇게 사방팔방으로 열려 있고 많은 예술가들은 그 길을 달려가고 있다.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이란 이름으로.

예술의 역사를 살펴보자. 예술의 역사는 모방과 재현으로부터 시작됐다. 미학평론가 진중권에 따르면 “원시 시대의 정교한 그림은 개념적 사유로 무장하지 못한 ‘벌거벗은 눈’의 자연주의가 높은 수준의 묘사를 가능하게 했다.”는 거다.

이후 모방과 재현이 예술의 역사를 장식했다. 그리스 시대부터 예술은 곧 모방으로 정의 내려졌고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모방과 재현이 술의 필수 공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바로 20세기 모더니즘에 이르러서다. 모더니즘은 모방과 재현의 틀에서 탈피해 미를 예술의 개념에서 간단히 빼버렸다. 아서 단토의 말마따나 예술에 있어서의 ‘빼기의 역사’가 펼쳐졌다.

백현호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모방과 재현에 충실했던 그가 거기서 탈출해 마구 휘저어대고 있는 거다, 행복하게…. 일탈의 거보는 2000년대 중반 무렵. 늘 새로 시작이라 하면서도 막사 저지르지 못했던 일탈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어떤 변명도 이젠 용납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확 내질렀다.

전통 산수의 기본기를 토대로 한 ‘하늘연가’ 시리즈가 그 첫 번째였다. 하얀 구름이 푸른 하늘에 펼쳐진 청아한 느낌의 채색화다. 보는 이로 하여금 명상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그런 그림이다. 변화를 주었으되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어정쩡한 변화에 만족할 그가 아니었다.

화면 속에 산이 드러나다, 삶이 드러나다

곧바로 화려한 채색의 산그림으로 옮아갔다. 휘황찬란한 색채감이 화면을 뒤덮었다. 월출산 덕룡산 만덕산 등 남도의 산들이 그의 색 단장과 힘 있는 갖가지 ‘준법’들로 예쁘게 치장됐다. 붓을 세워 힘 있게 긋는 ‘중필법’, 위에서 찍어서 내리 꺾는 ‘소부벽준’ 등 전통 준법을 동원해 보색 대비의 화면에 강렬함을 보태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내면의 강한 에너지를 아낌없이 토해낸 결과의 그림들이다.

변화가 가해졌어도 이때까진 실경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정산은 한 바퀴 더 뒹군다. 화려한 색을 말끔히 걷어내고 선도 깔끔하게 처리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 다시 말해 ‘천·지·인’ 시리즈로 접어든다.

단수한 구도, 단순한 색상으로의 변화를 꾀한다. 드디어 자신의 작업에서 더하기가 아닌 ‘빼기’의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시각적 빼기’를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더하기’를 했는지 모른다. 수없이 색을 덧입히면서 그는 빼기를 시도했다. 바탕에 깔린 색만 하더라도 다섯 겹 이상을 칠하고 그 위에 또 색을 올린다. 그러면 그 안에서 색이 우러나온다. 깊은 색이…. 수없이 행해지는 ‘더하기’ 과정을 통해 비로소 그의 ‘빼기’가 실현된다.

수없이 울리는 색 위에서 선으로서 산의 형상이 잡아진다. 덧칠 속에서 작은 산들은 안으로 숨고 큰 테두리산만이 작은 산들을 안으로 보듬어 안은 채 형상을 드러낸다. 마치 무등의 선같은 산이 화면 중에 자리하면서 위로 하늘, 아래로 땅임을 표시한다. 그것은 외형으론 산인 듯싶으나 산이 아니다.

그의 삶이다. 그의 삶이 그렇게 더하기를 통해 담백한 형태를 이뤄낸 것이다. 말로 형언키 힘든 진득한 삶의 편린들이 덧칠해지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이젠 큰 형체만이 대변하듯 큰 산으로 남아있다. 삶은 그 안에 녹아들어 있다. 지난 삶의 형편들을 굳이 말로….

빼기의 시대를 살며 진화하는 산수화가

설명하지 않아도 되듯 그림에서도 녹아들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 그리고 산을 오르는 또는 땅을 걷는 사람 몇이 그 살아 꿈틀거리는 이야기들을 말하며 듣는다.

“길을 찾아야 합니다. 가던 길을 그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제가 가야 할 길, 우리가 가야할 길을 찾아내야 합니다.”

30여 년 간 해온, 답답할 정도로 밟아온 전통산수의 기본기가 정산이 오늘 휘젓는 그림의 바탕이 됐다. 그래서 색과 선의 해방이 자연스럽고 세련됐다. 빽빽하거나 어색하지 않다. 오랜 재현과 모방의 세월을 거쳐 이제 ‘빼기의 시대’로 나온 정산의 작업은 날마다 진화한다. 때론 흐트러지고 때론 완전 자유를 얻은 듯 날아다닌다. 시작일 어려울 뿐 이제 어디로 날아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무등은 150만 명의 인구를 아우르는 큰 산이다. 봉우리도 많고 산줄기도 많으며 선과 바위, 능선도 많다. 그 능선을 면 분할을 통해 굵은 선으로 표현한다. 산의 굴곡을 선 굵은 라인으로 잡아 산을 다른 표현으로 그려낸다. 산의 능선, 능선과 능선 사이엔 예의 수없이 쌓아올려진 색이 옅게 깊은 농담을 드러낸다.

마치 우리네 인생살이처럼. 그리고 뼈아픈 상처도 나중엔 아름다운 사연이 되듯 그렇게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겨진다. 날아오를 높이를 가늠하지 않고 뛰어오르고 떨어질 곳을 짐작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휘젓고 다닐 그의 작업 행태가 예술 종말 이후의 새로운 예술로 자리잡을 듯싶다.

대동문화 78호 [2013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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