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한 그루가 언덕에서 바람에 휘둘리고 있다. 탱탱 부는 바람에 소나무는 부르르 떨며 버티고 서 있다. 쓸쓸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정감 넘치는 풍경, 괜스레 가슴이 아려온다. 20년 저쪽의 세월 속에서 손을 까딱이며 필자의 기억을 파고드는 화가 강운 씨의 작품 내용이다. 당시 강운은 그렇게 쓸쓸한 소나무를 하늘 풍경에 빠트렸었다. 그렇게 풍덩 빠진 소나무는 어디선가 봄직한 풍경이기도 했고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간 작가 자신이기도 했다.

자연 속에서 찾은 영원의 미학

그 소나무는 꼭 한 그루씩이었다. 적잖은 콜렉터들이 가슴 아리는 소나무를 소장하기 위해 젊은 작가 강운의 작업실을 찾곤 했고, 그런 콜렉터들을 강운은 헤벌쭉 사람 좋은 얼굴로 맞아들이곤 했다. 자연 풍경을 자신의 철학으로 걸러낸 그림은 매우 감성적이었다. 자연에 토대를 둔 감성의 발현은 꽤 오랫동안 그의 작업 반경 안에 있었다.

전시장에서 혹은 도록을 통해 빈번하게 강 선생의 작품을 대면하곤 했지만 작업실을 직접 찾은 것은 벌써 15년 전쯤 마치 그림처럼 초원 위에 자리했던 작가의 화순 작업실 시절이었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작업실은 같은 건물의 4층과 지하 공간 두 군데를 쓰는데 두 군데는 각기 다른 종류의 작업 공간으로 구분되었다.

지하는 철저히 대작 위주의 ‘구름’과 ‘하늘’이 펼쳐져 있다. 예의 소나무에서 발전한 풍경이고 4층에선 아크릴판 위에 일획을 그은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늘과 구름은 2000년부터 지금까지 근 15년 가까이 그려오고 있는 다소의 노동력이 수반되는 그림이고 4층의 작업은 개념을 담은 작업이라고나 할까. 그는 이 작업을 하루 중 반나절씩 나누어 진행하고 있다. 반짝이는 개념을 담는 작업은 머리가 개운할 때 가장 두뇌 작용이 잘 되는 시간에 맞춰 하고 지하의 작업은 아무런 생각 없이 무념의 상태에서 그리고 칠하곤 하는 그런 거다. ‘무아지경’이라고나 할까.

왜 이 두 가지 작업을 나눠서 할까. 나름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재미있어서다. 한 가지만 주구장창 하게 되게 너무 지루하다. 그러나 서정적인 작업과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작업을 구분해서 하게 되면 한 가지에 매진했을 때완 다르게 지루함을 쫓을 수 있다.

다음은 효율성이다. 노동성이 수반되는 구름과 하늘은 일정 정도의 시간을 확보해야 가능한 작업이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할라 치면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게 된다. 단순 노동에 이어 소위 두뇌를 써야하는 개념적인 작업을 하게 되면 노동성으로 굳어진 두뇌 작용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강운은 언젠가부터 하루의 절반씩을 뚝 떼어 내어 이 두 작업을 번갈아가며 한다. 거기서 그는 균형과 조화가 가져다주는 삶의 활력을 얻으며 작업량에 있어서도 일정량을 확보하는 일석이조를 거둔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그 너머의 세계를 갈파하다

다소 전근대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그 같은 가치기준을 고집하고 있다. 전통적인 회화에 크게 비중을 두고 있고 아이디어 위주의 현대미술 방식에 수긍하지 않는다. 소위 최신 현대 미술의 조류를 따라가기 보다는 자신의 회화 방식을 고수하며 거기서 뭔가를 일궈내고 공감대를 넓혀내려고 노력한다.

거기엔 전라도의 감성이 진하게 깔려 있다. 촌놈의 거치른 미감과 감성이 살아 펄떡이고 있다. 하늘, 바람, 구름, 물 등 자연의 순환적 질서, 생성과 소멸의 위치를 품고 있는 자연 현상의 재현을 통해 눈에 보이는 세계, 그 이상의 사유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그리고 강한 에너지가 숨을 헐떡이며 담겨 있다. 그렇게 펄떡이는 힘이 그가 가진 강점 중 하나다. 덕분에 자칫 옛 방식에 얽매여 뒤쳐질 수 있다는 우려를 깨끗이 접고 광주비엔날레에 두 번이나 참여했고 ‘쌈지 레지던스’에도 참가하는 등 중앙작가들도 부러워하는 반열에 올라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소위 잘나가는 작가 군에 속하는 것이다.

에너지와 에너지의 충돌과 화해가 스며든 화폭

지난 가을 광주 무각사 로터스 갤러리에서 선보인 작품들을 보자. 타이틀은 ‘무등도원경’이다. ‘물 위를 긋다’는 배채법으로 화선지를 아크릴판 위에 놓고 물을 뿌린 후 일획으로 그어내는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불투과적 성질의 아크릴판에 흡수되지 않은 에너지의 숨결들, 기포 반응들이 서로 스며들고 번져나가며 고스란히 화선지에 형상화된다. 이것은 화선지의 질감, 머금은 습기, 공기의 기운과 인간의 힘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마찰, 서로 당기고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와 에너지 사이의 충돌과 화해의 장이 된다.

순수 에너지들의 치열한 흔적은 우주의 변화무쌍함 속에 소우주로서 인간사의 혼돈과 갈등, 그리고 화합과 조화의 질서를 은근히 보여준다. 자연현상의 경이로움 앞에 인간 존재에 대해 다시 성찰하게 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물과 공기, 인간의 혼 그리고 그 너머 자연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비가시적 세계를 제시함으로써 보다 열려진 사유세계와 예술의 지향점을 모색하고 있다는 거다. 자신의 치열한 삶의 과정에서 얻어진 화두를 작품 안에 담아내고 있다. 텍스트나 기호, 이미지로 내재시켜내고 있다. 혹여 색면 추상의 범주로 이해될 수 있는 피상성 대신 자신의 삶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살아있는 생각을 아우른다.

이 작업들은 눈으로 확인될 수 없는 것들을 포괄한다. 예를 들어 쉼, 사랑, 삶, 성취감, 감동 등을 언어의 풍경이라는 형식으로 가시화시키고 해석한다. 강운은 ‘언어적 유희’라는 다소 가벼운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 놀이는 꽤나 진지하다. 또 수많은 시행착오와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얻어낸 깨달음을 토대로 한 것이다.

‘물 위를 긋다’가 무한의 세계에 대한 제시였다면 그 안에 잠겨 있는 ‘언어의 풍경’은 지극히 개인적 사유를 통해 보편적 공감을 유발시키거나 또 다른 사유의 파장을 유도하는 일종의 제안이다. 강운이 자신의 삶 속에서 느낀 가치들, 최근 극명하게 와 닿고 있는 삶의 화두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자 고백이다. 자신의 삶과 사랑과 예술의 존재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토해내고 있지만 결국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똑같은 하늘과 구름은 없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쓸쓸한 언덕 위의 소나무 그림을 보자. 강운은 대학 졸업 후 회색 빛 광주를 떠났다. 멀리 해남으로 내려갔다. 아무런 연고 없는 곳이었다. 당시 해남의 낮은 야산들은 산불과 해충으로 인해 벌채가 되어 민둥산이었다.

광주를 오고가며 본 해남의 풍경은 그야말로 쓸쓸했다. 간혹 하나씩 발견되는 작은 소나무 하나씩이 얼마나 가슴 짠한 풍경이었는지. 그걸 그는 형상화했다. 마치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연상시키는 그런 감성의 덩어리들이 뭉텅뭉텅 흘러 다녔다.

낯익은 풍경이되 때론 무료함이 느껴지는 그런 풍경을 그는 붓질했다. 개인적 체험을 자유의지와 사유로 선회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노을이 있고 바람이 있고 구름이 있고 그리고 소나무가 있는 그림은 자신의 질정 없는 의지가 사유의 세계를 펼쳐내고 있었다. 거치른 감성의 호흡이 숨을 헐떡이며 형상화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거기서 구름과 하늘만을 떼어내 스케일 있게 확대시켰다. 광활한 우주로의 의지를 구름과 하늘로 대신했는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느껴지는 쓸쓸하고 담백한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가령 해질녘의 노을을 보면서 구름과 바람과 음영이 빚어내는 순수 서정시를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구름과 하늘, 그리고 물 위로 흐르는 붓

강운. 구름 운이다. 자신의 이름에서 벗어날 길 없는 운명처럼 그는 그렇게 구름과 하늘을 그렸다. 구름 운자를 달고 나온 작가에게 ‘서정의 장소’가 몸속 깊은 곳에 아로새겨진 듯 그렇게 하늘 속으로 풍덩 빠져 들어갔다. 구름과 하늘은 그에게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광주비엔날레 참여 작가로 우뚝 서게 했고 쌈지 레지던스 작가로 끌어들인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쌈지 스튜디오와 광주시립미술관 레지던시를 거치면서 고정화, 내성화되어 가는 구름 유화 페인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계속되었다.

고향의 바람과 하늘빛과 물빛은 강운에게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청자 축제 참여 차 강진을 방문했을 때 우연히 들른 마량 앞바다의 은은한 물빛을 보고 그 비취색의 빛깔이 문득 하늘빛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늘빛이 내려앉은 물빛의 유희가 그를 끌어당겼다.

그 감성을 형상화한 것이 ‘물 위를 긋다’이다. 종이 위를 물로 긋듯 최소 행위만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지향점을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도구와 재료와의 대면은 충격을 발생시키고 이 충격은 궁극적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각기 다른 생동감을 전한다.

그는 두 종류의 사뭇 다른 형태의 작업을 병행시키는 동시에 ‘비빔밥’이란 공동 작업을 이끌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이 재밌고 흥미롭다. 지향성과 철학을 담보하는 치열한 작가 정신으로 그는 날마다 노동처럼 구름과 하늘을 그리고 또 무엇이 어떻게 떨어질지 모르는 물위를 긋는 작품을 번갈아가며 자신이 무얼 하고 싶은가의 궤적을 형상화해내고 있다.

대동문화 80호 [2014년 1,2월호]

김영순 광주문화재단 정책연구팀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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