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을 벗는다. 아니 깨부순다. 이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희망한다고 되는 게 절대 아니다.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아픔과 고통이 있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른 바 탈각을 희망한다.

초년병들이야 자신의 콘셉트를 잡는데 온통 에너지를 쏟지만 중견작가들은 탈각에 심혈을 기울인다. 미술에 막 입문한 초보자들에게도 사실, 탈각의 과정은 필요하다. 신참자건 원로건 간에 예술을 업으로 하는 그 순간까진 탈각은 작가들이 계속 꼬리표로 달고 다녀야 하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탈각’, ‘껍데기를 홀라당 벗고 까이는 것’을 이름이다. 바라고 또 바라는 일이건만 쉽사리 되지 않는 탈각을 도대체 누군들 제대로 해낼 수 있고 그 흉내라도 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의문을 품고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으로 쌩 달려간다.

누군들 탈각하고 싶지 않은 작가가 있으랴?

따가운 햇빛이 내리쬐는 6월의 한가로운 주말 오후, 물이 오르다 못해 독처럼 퍼져나간 진록의 나뭇잎이 아직은 예쁜 모습으로 손을 뻗치며 반긴다. 여유로움이 똑똑 묻어나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전시는 다름 아닌 지암 김대원 선생의 ‘마음을 걷다’전이다.

1층과 2층을 빼곡히 채운 작품들은 선생의 40년 화업을 중간 정리하는 듯 짧지 않았던 예술 인생의 전모를 파노라마로 쫘악 펼쳐놓는다. 1층과 2층의 색채가 확연히 다르다. 색채만이 아니다. 화풍 자체가 다르다. 이렇듯 다른 그림들을 한 작가가 그려내다니? 살짝 의구심이 들 법도 하건만 시기별로 적절히 ‘탈각’을 거듭해온 선생의 예술 행로를 조금은 아는지라 의구심을 저만치 물리치고 차분차분 그림 감상에 들어간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1층은 화려한 색상이 시선을 꼬옥 붙잡는다. 올해 신작인 ‘거룩한, 거창한, 거추장스러운…’만 하더라도 레드의 강렬한 컬러가 관람객을 단박에 압도한다. 구성적 미학이 돋보인다. 거기에 색면이 주는 강렬함은 아무리 덜어내려 해도 덜어지지 않고 질주하듯 우리네 동공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제목과 딱 부합하는 작품이다. 거룩하다 못해 거창하고 거창이 너무 울창해져서 거추장스러워졌다나, 어쨌다나. 이번 전시의 타이틀 작품마냥 전시장 입구에서 떠억 버티고 있다. 일별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우와, 이게 한국화일까 싶다. 이미 소재와 재료가 한국화를 뛰어 넘어선 화풍이다.

수묵 산수화로 시작한 작가가 어떻게 이리도 자유분방한 색깔의 향연을 즐길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다시 한 번 더 놀란다. 거기다 자유로움이 한껏 묻어나는 구성이 ‘형상을 초월한 형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자유로운 색채와 구성의 향연에서 벗어나 2층으로 향한다. 수묵의 세계다. 곧고 바른 정신으로 내보이는 담백한 세상이다. 채색도 간간이 있지만 정갈한 수묵 일색으로 1층과는 사뭇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는 오랜 세월 수묵화가로 활동했다. 먹으로 산수, 그것도 전통산수를 꼼꼼히 그렸다. 그의 행보로 보아 수묵의 세계가 색다르지 않건만 현재의 작업을 먼저 본 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거꾸로 수묵산수를 본 이들은 현재의 작업에 또 화들짝 놀라기 일쑤다.

머물지 않는다, 변신을 온몸으로 밀고가다

그는 70년대 중반, 전통에 대한 학습을 꾸준히 그리고 엄격하게 이행했다. 그러길 10여년이 지날 무렵, 학습으로 다져진 관념 산수에 계속 머물길 거부했다. 그리고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생동하는 현장의 실경을 묘사했다. 곧고 힘찬 필법은 여기에서 다시 빛을 발한다. 웅장하면서 힘찬 산세를 거친 붓질로 그려냈다. 담백함이 깃든 가운데 거치른 준법과 필법이 혼용된 화면은 수묵의 새로운 영역을 보여준다. 지암의 남다른 예술관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탈각의 탈각이 계속된 것이다. 9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시도가 화면에서 이뤄진다. 민속 설화나 전래 동화 소재를 산수와 결합하는 민족문화의 재해석기를 맞이한다. 97년, 99년 전시회 때 선보였던 ‘옛날 옛적에’ 시리즈가 그것이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정통 먹산수를 꼼꼼하게 그렸고 실경산수를 그렸다 해도 먹산수의 기본기를 철저히 다졌던 지암은 이때 슥슥 붓질 가는대로 호랑이를 단순화시켜 그려냈다. 또 의당 있어야 할 산수 배경이 아예 생략돼 전통 산수화의 품새로 따지면 그리다 만 그림꼴로 완성작이라 내놓았던 셈이다. 그러한 작품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그러다 2천년 이쪽저쪽해서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 바로 자유로움의 탐닉이다. 대충 그렸던 형태마저 아예 찾을 수 없는 비구상이 그것이다. 굳이 일없이 앉아 들여다보고 있으면 뭔가 꿈틀대는 형상들이 있긴 있는 것 같지만 언뜻 보면 아무런 형체도 찾을 길 없는 비구상이다. 그냥 붓질하고 싶은 대로 칠하고 맘껏 휘저은 그림이다. 철저하게 날선 감각의 조형성이 춤춘 결과다. 그 조형성의 호흡으로 꺼이꺼이 길고도 가는, 때론 거친 숨결을 벗 삼아 그어댄 자유로운 붓질의 자욱이다.

자유로운 추상 조형의 생동감 빚어내다

이 조형들은 도대체 어떻게 빚어졌을까 궁금해진다. 미리 전부 짜여진 계획 속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우연의 산물인가. 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 2층 베란다에서 마주친 지암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답한다. 한때는 우연이라고 우겼었다고…. 계산 아래 조형이 나온 것도 있지만 대부분 우연에 기인했기에 그렇게 생각했단다.

세밀한 색상의 어우러짐 속에서 나오는 우연이긴 하다. 허나, 전체적인 형태는 잡고 나가며 어느 정도 계산에 의한 것이기에 완전한 자유로움의 발로는 아니라고 털어놓는다. 옆에서 보기엔 이미 자유로움을 얻은 듯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자유로움을 언제나 터득할 수 있느냐가 남은 미션이라며 미소를 멈추질 않는다.

화업 40년. 먼 길을 왔다. 중고등학교 미술부는 물론 대학에서도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화, 당시 동양화로 불렸던 수묵산수로 길을 튼다. 대학 때 조선대로 강의를 나오셨던 희재 문장오 선생을 만나면서부터다. 그의 인품이 훌륭했고 수묵의 멋에도 반했기에 별 고민 없이 수묵산수로 길을 바꿨다.

당시 스승은 ‘조금 하다 말겠지!’ 하는 심정으로 해보라고 건성으로 대답하신 것 같다고….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만 두기는커녕 더욱더 달려드는 끈덕진 근성에 제자로 받아들이셨단다.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이 그대로 반영된 듯 정직한 수묵산수의 세계를 제자에게로 이식시켜준 분이다.

거의 아버지처럼 모신 스승이 올 봄 세상을 하직하자 지암은 몰려드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꺼이꺼이 울었다. 지금도 누군가 희재 선생 이야기만 꺼내면 눈물을 감추질 못한다. 스승 생각에….

지암이 수묵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이것저것 여러 가지에 도전을 감행하고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한 번도 내색을 않으셨다. 제자의 예술관을 인정해주신 것이다. 옴쭉달쑥 못하게 하는, 동양화 계열에서 보여지는 사제지간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 점에서도 지암은 스승에게 감사드린다.

마음 위를 붓으로 건너왔습니다

수묵으로의 선회는 지암의 집안 내력과 어렸을 적의 행보를 보면 그리 생뚱한 것은 아니다. 무안에서 내로라하는 토호였던 할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 집안은 늘 예술인들이 객으로 머물며 예술 훈향으로 넘쳤다.

의재 허백련과 남농 허건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대가들이 몇 개월씩 머물며 사랑채에서 먹으로 그림과 글씨를 써 재꼈다. 그걸 보고 자란 지암은 자연스레 서예를 끼적였고 그에 대한 매력을 일찍이 터득하고 있었던 셈…. 그러니 지암이 수묵산수화를 보고 반한 것은 고개 갸웃거릴 일이 전혀 아니었다.

선친은 동경 유학파로 독립운동가셨다. 무안의 3.1운동을 주동했던 분으로 나라 위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컸었다. 지암의 배포 크고 선 굵으며 거친 붓질, 하물며 수묵 세계에서조차 과단성 있게 그어댄 붓질은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DNA 영향이 크다. 그리고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뭔가 새로움을 향해 자신이 갖고 있는 기질을 벗는 탈각의 정신도 같은 연원에서 시작한 것이라 짐작된다.

현대 수묵 정신으로 특별한 회화 세계 경지 열어가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먼길을 돌고 돌아서 여기에 이르렀지만 이제 또 다른 시작점에 와 있다. 조선대 교수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아 전업 작가로의 변환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탈각에 대한 노력은 기울이고 있으나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움으로의 탈각은 아직 먼 듯 싶어 이래저래 새로운 시작을 꿈꾸고 있는 셈이다.

시작은 다소의 설렘을 동반한다. 처음 수묵의 세계로 노선을 바꾸었을 때도, 수묵의 세계를 탐닉하다가 비구상으로 돌아섰을 때도, 그리고 이제 채색이 강해진 색채의 향연으로 들어가는 중에도 지암은 마치 연애하는 것 마냥 설레는 감정을 억누를 길 없다.

그 설렘으로 지암은 하루 온 종일 붓을 잡고 형상을 빚어낸다. 이제 지암의 남겨진 과제는 완전한 자유로움의 터득과 화면으로의 실현이다. 그 짓을 성공하기 위해 지암은 부지런히도 붓질을 해야할 것 같다. 쉬지 않고 긋고 만드는 과정에서 의식하지 않은 채 조형성이 쏟아질 날이 올 듯싶다. 그 날이 머지않았다.

대동문화 83호 [2014 7,8월호]

김영순 광주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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