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경기도 양평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든 부부는 그들만의 ‘화원(畵園)’을 만들었다. 지난 8월 초 양평으로 부부 화가를 찾아갔다. 박동인 화백이 순수 운전하여 양평역까지 마중을 나왔다.

집안으로 들어서면 구불구불한 소나무가 마음 편하게 맞아주고 마당 옆으로는 나무, 꽃들이 소담스럽고, 공룡알 같은 조각들이 반겨준다. 지난 5월 방문했을 때도도 꽃이 만발했는데, 여름 막바지에도 꽃이 마당을 화사하게 물들이고 있다. 사시사철 꽃이 피는 곳인가?

그 뒤 텃밭에서 주렁주렁 열린 고추, 보랏빛 가지, 아직은 파란 토마토가 싱싱하게 자란다. 이어 하늘로 치솟는 자작나무들을 보노라면 이런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20년 전 부부는 양평에 들어와 허허벌판을 다듬어 살 집을 짓고 나무와 잔디를 심었다. 양평 강하면 전수리, 부부가 사는 곳은 집이자 작업실이자, 미술관이다. 필자가 이곳을 찾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 벌써 이곳에 마음을 빼앗겼다.

“1988년에 이곳을 지나다가 너무 아름다워 땅을 사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어요. 신혼 때 남편이 시골에서 살겠다고 하여 그게 언제 이루어지나 했더니, 이곳에 산 지가 벌써 20년이 됐네요.”

그림과 자연과 사람이 일체로 사는 땅

부인 김동희 화백은 아무 연고가 없는 양평에 이주하게 된 까닭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화가 부부는 미술관을 겸한 살림집을 만들었다. 옹벽집을 지어 전시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고 각자의 작업실을 두어 창작 공간을 확보했다. 거실에서 통유리 가득 마당을 바라보면 한 폭의 그림이 앞에 나타난다. 땀을 흘려 가꾼 나무며 꽃 등이 햇빛 속에서 연출하는 풍경을 한 걸음 멀리서 날마다 바라보면, 늘 그림 속에 사는 듯하리라. 그림과 삶의 일체. 부부 화가는 그렇게 자연에 묻혀 자연을 화폭에 담아 세파에 시든 이들에게 싱싱한 자연을 전한다.

고등학교 미술반 시절에 부부는 만났다. 박동인 화백은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 2학년, 김동희 화백은 전남여자고등학교 미술반이었다.

“5.16이 나던 해 1961년 광주에 ‘청자회’라는 고등학교 미술반 모임이 있었지요. 그때 같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무렵 ‘청자회’는 교장단이 함께 서클을 지원할 만큼 관심을 끌었다. 고등학교에도 폭력 서클이 많았던 어수선한 시절. 미술이라는 예술 활동을 하는 모임에서 희망을 발견한 것이리라.

“그때 강연균 선생이 회장이었고, 제가 부회장을 맡았지요. 그때 교수님이 오지호, 양수아 선생이셨습니다. 이 청자회 활동이 광주 미술의 태동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런 활동은 전무후무한 일이지요.”

박동인 화백의 회고에 김동희 화백도 옛 추억에 젖어든다.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지요. 50년을 같이 했네요. 지겹게 오래 같이 사네요.”

청자회 회원들은 새벽에 충장로에 나와 그림을 그렸다.

“아침 일찍 충장로에 나와 그림을 그리고 학교에 갔습니다. 매일 그렇게 했지요. 거리 풍경, 뒷골목 풍경, 참 많이 그렸습니다. 5월 새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금이 어떤 때인데 그림을 그리냐?’며 ‘미친 녀석들’이라고 말하고 지나가던 게 생각납니다. 알고 보니 5.16이 일어났더군요.”

이렇게 열심히 그림을 그려 고등학교 때 기초를 다 닦았다. 대학에 가서도 미술에 몰두했다. 김동인 화백은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 회화과에 진학했고, 박동희 화백은 홍익대학교에 들어갔다. 방학이면 작품을 모아 광주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방학 때 ‘설경전’을 개최했습니다. 지금 쟁쟁한 화가들도 그때 함께 참여했지요. 눈 위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붓질을 하면 물감이 얼면서 번지는 효과가 있었지요. 그때는 참 열정이 넘쳤지요.”

그런 열정을 화폭에 담아 보낸 세월. 박동인 화백은 1977년 제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열두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아세아 현대미술제 초대(1978. 일본 동경), 한국현대미술전 초대(1984. 이탈리아 밀라노) 등 국내외 단체전에 다수 참가했다. 한국미술협회전 금상(1977), 미술세계상(2010) 등을 수상했고,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 운영위원과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추계예술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50년을 함께한 화업, 그리고 다사로운 동행

1944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박동인 화백은 어려서 몸이 약했다. 달리기나 운동 등을 하지 못해 어린 마음에 열등의식이 있었다. 중학교 때 그림을 그리면서 달라졌다.

“선생님이 잘 그렸다고 칭찬을 해주는데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어요. 인정해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선생님은 박 화백의 부모님을 설득하여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했다.

부인 김동희 화백은 어떻게 미술에 입문했을까. 곁에 있던 김 화백이 박 화백의 뒤를 이어 말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특선을 했어요. 그때 오빠가 화구를 사주어 미술을 시작했지요. 물론 좋아서 했지요. 그래서 그림을 계속할 수 있었지요.”

박동인 화백이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가 어느 날 밥상에 사기그릇을 몇 개 올려놓고 ‘너, 이것 그릴 수 있느냐’고 물어서,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그리면 된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말했다. “이것을 그리려면 그냥 그릴 것이 아니라 이것이 여기까지 온 모든 과정을 알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다 과정과 이유를 알고 그것을 새겨야 한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박동인 화백이 그리는 그림의 방향이 되었다. 대상을 그리기 전에 왜 여기에 있는가를 캐고 공부를 했다. 그림을 해야 공부를 절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자연을 그리되 환경과 생태에 대한 세밀한 관찰, 그리고 그의 세계관을 반영하여 작품을 창작해냈다.

들풀과 들꽃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묘사된 것 이상의 형상으로 처리된 그림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자연이 연출해내는 생명의 절정과 환희 그리고 그 축제의 신비가 엿보인다. 이런 들풀과 들꽃을 화폭에 담아 대자연의 비밀을 담은 미물에 대한 예찬, 생명을 수태하고 성장시키는 자연에 대한 예찬을 깊이 있게 돋을새김하고 있다. 사실주의에 추상미술을 가미하여 자연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그만의 자연으로 재창조해냈다.

그가 나고 자란 농촌,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의 뇌리에 깊이 잠재되어 화폭에 전개되고 있다. 그런 기억이 그를 양평으로 불렀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마음이 보는 대로

광주에서 자란 김동희 화백은 1967년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을 계속하여 개인전 5회를 열고 단체전과 초대전에 수십 차례 참가했다. 한국미술협회, 구상전, 홍익여성화가회 회원, 양평미술협회 회원. 9월에는 한독미술교류전 준비로 바쁘다.

같은 길을 가는 부부 화가. 김동희 화백은 남편 박동인 화백에게 고마워했다.

“그림을 할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마워요. 전공을 살릴 수 있었어요. 경제적으로 힘들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어 행복을 느낍니다.”

주부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터. 박동인 화백은 김동희 화백이 그림을 그리다 냄비를 자주 태웠다고 웃는다. 풍족하지 않지만 좋아하는 것을 하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밀어주고 함께하는 삶. 동고동락의 행복이 이 부부의 집에는 가득하다.

같은 길을 가는 부부의 좋은 점은 무엇일까?

“서로 상황을 잘 알아 말하지 않아도 이해가 되어요. ‘그림’을 놓고 대화가 가능하지요. 최고의 비평가를 끼고 사는 셈이지요. 서로 그림을 보고 잘못을 지적하고 수용할 수 있는 관계이지요. 물론 부딪힐 수도 있어요.”(박동희 화백)

수십 년을 두고 작품 세계가 변해온 과정을 알고 한 폭 한 폭 그림의 탄생 과정을 옆에서 계속 지켜보는 눈이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눈을 견디어낼까.

“나는 뭔가 부족하여 더 그리려고 하면 남편은 그만하라고 해요. 그만하면 됐다고 하지요.”

박동인 화백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 완성된 작품이 이미 머릿속에 다 있다고 한다. 김동희 화백은 그 반대. 그리면서 계속 변하여 완성된 후 어떤 작품이 나올지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화폭에 많은 것을 담고 싶어 한다. 그런 아내의 그림에 절제를 가하는 게 박동인 화백의 역할.

감동희 화백의 남편 박동인 화백의 작품집을 넘기며 작품 세계의 변화, 당시의 화단의 평가 등을 들려주었다. 같은 길을 가는 부부만이 할 수 있는 일.

그림도 닮고, 사람도 닮아가는 즐거움

서로 다른 미술 세계를 그리던 부부가 양평에서 함께 작업하며 부딪히는 고민은 화풍이 같아진다는 점이다. 작업실을 달리하고 각자 혼자 작업을 하지만, 자연에 묻혀 자연의 신비를 천착하다 보니 그림도 닮아지는 것인가. 갈대, 옥수수 등을 자주 그려 ‘갈대의 신사’라는 별명이 붙은 박동인 화백은 근래에 빨강색을 많이 쓴다. 가보지 못한 세계를 동경하여 ‘바다’를 자주 그렸던 김동희 화백은 ‘자연’을 자주 담는다.

교수로 은퇴하고 여유를 찾게 된 지금 박동인 화백은 요즘 나무 조각을 많이 한다. 새로운 창작에의 도전이다. 얼마 전 초대전을 개최한 김동희 화백은 9월 서울에서 열리는 한독미술교류전에 참가할 작품에 몰두하고 있다. 텃밭에 줄줄이 열린 고추가 빨갛게 익을 무렵, 부부의 화실에는 새로운 작품이 완성될 것이다.

화가 부부의 자녀는?

“아들만 둘인데 큰 아들은 의사, 둘째 아들은 공대를 나왔어요. 며느리라도 화가를 얻을까 했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었네요.”

화백 부부가 직접 재배한 고추, 가지는 전에 고향집에서 먹던 맛 그대로였다. 부부가 화폭에 담아내는 자연. 삶과 그림이 하나이다.

대동문화 84호 [2014 9,10월호]

정유철 기자  hsp3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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