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일(72) 화백은 블랙의 화가다.

“블랙은 모든 빛깔의 원천입니다. 색들이 섞이면 블랙이 되지요.”

그의 말처럼 색이 섞이면 블랙이 된다. 태초의 우주가 그랬듯 모든 것의 본질은 블랙이다. 그래서 블랙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화려한 색깔이다. 보는 이에 따라, 감상하는 이에 따라, 그 얼굴과 느낌이 천 가지, 만 가지로 달라지고, 확장되는 것이 블랙이다. 블랙은 그래서 단언하고, 단정할 수 없다. 그 깊이와 넓이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블랙은 모든 것을 품고 있다. 그래서 블랙은 생성의 색깔이다.

블랙의 화가. 그에게 붙는 수식어가 그래서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2월 초, 오후 늦게 찾은 김종일 화백의 작업실 안에는 포실한 햇빛이 깊숙이 밀려들어와 있었다. 그 햇빛 속에서 그는 또 하나의 빛의 입자로 움직이고 있었다. 겨울, 그 환한 햇살 속에 캔버스를 눕혀놓고 작업하고 있는 그의 손끝에서 화려한 색채들이 저마다의 빛깔로 수런거렸다. 작업실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조각보 같은 작품들이었다. 사선과 직선으로 면을 가르고, 그 면마다 들어있는 화려한 색채들이 빛 속에서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색의 합주와 변주. 그것들은 가지런하고 규칙적이면서도 역동적이었다. 선과 선이 교차하고 선과 선으로 면들이 분할되고 합쳐져 나타나는 격자무늬의 작품들. 그것들은 어딘지 낯이 익고 정겨워보였다.

모든 것의 본질은 블랙이다

김종일 화백.

미술계에 종사하는 이는 물론이고, 그림을 좋아하는 이 가운데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이력은 화려하고, 또 그만큼 열정적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 왔다는 반증이다.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지 않겠는가마는 화백의 모든 감각기관들은 그림에 닿아있다. 그런 그는 천상 예술가이다.

김종일 화백은 광주사범 중학교를 거쳐 서라벌 고등학교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이어 중앙대학교에서 남은 공부를 마쳤다. 광주사범 중학교 시절에는 연극도 했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미술. 어떤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고 그냥 그렇게 마음이 끌려서 선택하게 됐다. 만약 그가 연극을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운명은 그를 다시 화가로 불러 앉혀놓았을 것이다.

아들이 가난한 예술가가 되는 것을 좋아할 리 없는 여느 부모들처럼 처음, 화백의 아버지는 그가 그림 그리는 일을 마뜩치 않아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원하는 교사가 되는 일과 그림 그리는 일을 함께 병행하는 길을 찾아냄으로써 그림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활발한 작품 활동과 더불어 여러 곳에서 후학들을 길러냈다. 그가 정년퇴임을 맞은 곳은 전남대학교. 화백은 화가로서 자신의 세계에만 골몰하지 않고 제자들을 길러내고 지역미술발전에도 큰 힘을 보탰다. 삶을 욕심껏 운용해온 결과인지 그의 표정 어느 구석에도 지나 온 삶에 대해 아쉬운 회한은 없어보였다.

비구상 화가 ‘에뽀끄’ 결성 전시회

김종일 화백은 얼마 전 이제까지 걸어온 자신의 길을 돌아보는 큰 작업을 마쳤다. 국문과 영문으로 된 화집출간이 그것이다. 화가로서의 삶 53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364페이지 분량의 꽤 두툼한 책자이다. 거기에는 젊은 시절의 그림에 대한 순정한 열정에서부터 자신의 세계를 찾아가는 고된 여정과, 원로로서, 어른으로서 책임감은 물론,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의지가 세밀하게 담겨있다. 그 책자를 보고 있노라면 한 개인의 역사는 물론 광주의 화단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비구상계열의 광주미술의 중심에 그가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청년시절, 그가 비구상화 화가로 이름을 올릴 때 이 지역은 남종화의 산실이었고, 그만큼 영향과 입김이 거셌다. 게다가 오지호 화백을 중심으로 모두가 구상화를 그렸고 좋아했다. 그런 와중에 비구상 작품을 하는 사람들은 소위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 그만큼 비구상의 지형은 열악했고, 비구상화단은 척박했다.

그 때 김종일 화백은 비구상화가로 구성된 ‘에뽀끄’를 결성해 전시회에 나섰다. 1964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우연치 않게 한 지역방송사의 피디가 이들의 전시회를 소개함으로써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에뽀끄의 첫 전시회는 구상회화와 남종화가 위세를 떨치던 광주에 현대미술의 기틀을 마련한 셈이었다. 그 전시회로 광주의 미술은 그만큼 풍요로워지고, 다양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에뽀끄의 초기 멤버였던 양수아, 최종섭 화백 등은 이미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에뽀끄는 여전히 건재하다.

에뽀끄가 지금껏 해체되지 않고 유지돼 온 데는 김종일 화백의 힘이 컸다. 그는 에뽀끄의 초대이사장을 지내면서 ‘황토회’ 같은 여러 미술단체와 합동 전시회를 갖는 등 다양성을 꾀하면서 광주의 미술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게다가 1995년에 에뽀끄 회원이 주축이 돼 열린 광주 국제전은 광주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고, 이어 광주비엔날레 개최로 이어졌다. 그때 당시 참여한 나라는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8개국. 이는 광주미술의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에뽀끄는 부산의 혁동인과 함께 지방단체로는 드물게 50년 넘게 지속돼온 단체입니다.”

그가 갖는 에뽀끄의 자부심과 자긍심도 대단하다.

하지만 그가 비구상회화만 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구상회화로 시작했다. 김 화백은 아직도 백여 점이 넘는 구상작품도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비구상으로 돌아선 건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것, 새로운 것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비구상화였다. 그의 비구상으로의 전환은 성공이었다. 김종일 화백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시도했다. 한 화가는 일생을 통해 여러 차례에 걸쳐 그 작업의 방향이 크게 달라진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다양한 실험을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작가정신이 살아있다는 말로도 대변된다.

김종일 화백 역시 그렇다.

김종일 화백의 작품세계는 시대별로 다섯 개의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1기는 1960년대의 ‘초기회화시대’이고, 2기는 1970년대의 ‘흑색시대’이다. 이 흑색시대에서는 검은 색에 매료돼 블랙을 주로 담아내는 작업을 했다. 3기는 ‘빛과 음영의 조형미 시대’로 불리는 1980년대로, 블랙에서 벗어나 불꽃같은 색채들로 색들의 운동성을 표현해냈다. 제 4기는 1990년대로 ‘추상회화와 한국 전통의 만남시대’ 로 불린다. 이때 김 화백은 한지에 작업을 하거나 우리의 문양을 화폭에 담으며 우리 것을 탐미하는 작업들을 이어간다. 제 5기는 ‘순수의 시대’로 부르는 2000년대로 다시 블랙으로 회귀하고 있다.

한국 전통에 닿은 작가의 정신

블랙의 화가가 블랙에서 벗어나 다양한 색깔의 변주를 시도하게 된 계기는 전남대학교로 부임해오면서부터이다. 당시 광주는 5․18의 아픔에 함몰돼 있었다. 그런 터수에 검정의 이미지는 너무 무거웠고, 그 날의 상처를 환기시키는 은유의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주변의 충고도 이어졌다. 이제까지 해 온 블랙의 독주에서 벗어나 무언가 다른 색채가 필요했다. 김종일 화백 스스로도 그림은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일단 그림을 그리는 이가 행복해져야하고, 보는 이에게 행복감을 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블랙의 변주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블랙 안에 들어있는 색채들을 꺼내 터트리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로 와 블랙의 망토를 벗고 새롭게 시작한 작업들은 마치 불꽃들을 보는 듯하다. 점점이 하나의 불씨로 떨어지는 불꽃들이 바로 김화백의 그림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창호지에 난 구멍일 수도 있고, 스러져 간 광주의 젊은 영혼들일 수도 있다. 보는 이에 따라 그 불꽃들은, 편린 같은 색의 조각들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그 불꽃같은 불씨들의 이미지에 몰두했다. 블랙의 화가에서 화려한 색채의 화가로 그는 거듭난 것이다.

하지만 김종일 화백의 작품에서 여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직선과 사선에 의한 면 분할과 다양한 색채이다. 그것은 일정한 주기를 갖는 운동 같기도 하고, 시간의 순환 같기도 하다. 그 반복되는 이미지에서 끊임없는 운동성과 에너지가 느껴진다. 야마기시 노부오라는 일본 미술평론가는 그걸 가리켜 격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격자에서 연상되는 것은 우리의 전통생활 물품인 조각보였다. 그의 정신의 뿌리가 한국의 전통에 닿아있다는 증거이다.

화가로서 55년을 지낸 만큼 그의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긴 반세기를 넘기는 동안 쉼 없이 작품에 몰두해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의 정신의 산물로써, 감정적 투사물로써, 그의 작품들은 그의 분신처럼 곳곳에서 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 많은 작품들을 다 기억하고 있을까. 화백의 작업실 한쪽에는 수많은 작품들이 빼곡하게 들어있었다. 작품의 크기와 양에 놀랐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꿈이 있다. 꿈은 여전히 그를 설레게 하고, 에너지를 선물한다.

“커피를 수입해올 때 그 커피를 싸고 있던 직물을 이용해 새로운 작업을 해볼 생각입니다.”

화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간단없는 실험과 시도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김 화백 역시 같다. 그림이 자신에게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그저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요즘 다시 그는 블랙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블랙은 여전히 그에게 생성의 이미지이자 매력적인 세상이다.

빛의 무덤. 빛의 고향. 블랙. 그에게서 블랙의 향기가 난다.

대동문화 87호 [2015 3,4월호]

은미희 소설가  -08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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