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을 하루 같이 장도를 말들어온 장인이 입을 연다. 말이 무겁다. “선친께 배운 것은 기술만이 아니라 정신을 이어가는 가치였어요. 사업성이나 수익성만 생각했다면 오늘의 광양 장도는 없었을 겁니다.”

그의 장도를 들여다본다. 아름답다. 그의 장도를 보고 있으면 칼이라기보다는 보물처럼 느껴진다. 칼의 폭력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장도는 섬세한 세공과 단아한 아름다움이 뭉친 하나의 예술품으로 승화된다.

‘은장도’는 장도를 흔히 이르는 말로 쓰인다. 장도는 주로 금·은·옥 등 귀금속과 보석으로 멋을 낸다. 칼집과 손잡이에는 섬세한 세공을 한다. 남자의 장도에는 문구와 산수, 운학, 박쥐, 용 등이 새겨진다. 여인들의 장도에는 꽃나무, 나뭇잎, 국화, 매화, 난 등이 새겨져 있다.

장도 장인 박종군(54), 그가 손에 쥔 한 뼘 남짓한 작은 칼에는 찬 서리처럼 매섭고 버선 끝처럼 날카로운 정신의 고결함이 담겨있다. 단순하게 호신용 칼을 만드는 게 아니다. 그 칼이 살아온 정신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광양 장도의 길이다.

그는 광양읍에서 3대째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당연히 광양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 선친이 장도에 바친 평생의 가업을 이어받아 지금의 박물관을 만들었다. 그의 선친은 평생 은장도를 만들며 마음 편할 날 없었다. 그렇다고 돈을 번 것도 아니다. 오히려 궁핍에 가까운 세월을 정신 하나로 버텨냈다.

그에게 거창한 소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평생의 업이던 은장도의 맥이 끊어지지 않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그러므로 그는 행복하다. 아들이 그 맥을 이었다.

장도를 품고 전통을 소통하다!

장도장 박종군은 국내 최고의 장도 전통공예기술을 엿볼 수 있고, 인간문화재와 직접 전통기법 체험도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을 여러 차례 마련했다. 칼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장도는 단순한 칼이 아니다. 그동안 힐끗 보고 지나쳤던 은장도는 과연 어떤 의미를 품고 있을까?

“예전 사람들은 은장도라는 비밀호신무기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보통 아녀자들만 가지고 다녔다고 알고 있는데 의외로 남자들도 많이 가지고 다녔어요. 손바닥만 한 작은 칼인 은장도는 품속에 휴대하고 다니기가 간편했고 겉으론 아무표시도 안 나서 상대의 경계심을 일으키지 않아 좋았습니다. 그 작은 칼이 비상시엔 자신을 지키는 무기가 됐습니다.”

특히 광양 장도는 장인의 혼과 정교한 장식으로 예술성이 높은 은장도로 알려져 있다. 선비와 부녀자들이 주로 사용해 왔고 세종대왕이 차고 다닐 정도로 예술가치가 뛰어났다. 아버지인 (고)박용기 옹에 이어 아들인 박종군(54), 손자 남중(24)으로 3대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해마다 전시회를 연다. 충절과 절개의 정신이 깃든 한국 장도(粧刀) 문화를 알리기 위해서다. '인간문화재 박종군, 한국 장도의 美' 전시회는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삶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세월을 은장도와 함께 보낸 박종군. 어쩌면 선생의 삶은 좋은 칼은 만들기 위한 시간이기보다는 좋은 재료를 찾기 위해 보낸 날들로 집결되는지도 모른다. 은장도의 생명은 정신을 입히는 사람 속에 숨어 있다.

“이제는 세상 향해 당당하게 소리 칠 수 있습니다. 감히 내 분야 내가 해온 일을 이만큼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이 도시에서 몇이나 될 수 있는가 자문하면서 스스로 뿌듯할 때도 많아요. 특히 광양처럼 문화 벽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적어도 문화가 없는 광양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했어요.”

어쩌면 이것은 자만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건네는 주문 같은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삶이었다. 그는 자신의 피눈물을 삼키고 가족의 희생까지를 요구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박송순이 걸어온 길은 개인의 길만이 아니었다. 지역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만약 장도만 제작하고 판매할 요량이었다면 굳이 돈을 들여가며 은장도박물관을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계에서 하나뿐인 은장도박물관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무형문화유산이다. 여기는 곧 5000년 우리의 역사와 문화와 예술이 살아있는 교육장이다. “굳이 문화재를 떠나서 조상의 훌륭한 문화유산을 방치한다함은 후손된 도리가 아닙니다. 방치는 역사와 민족에 대한 불충이라 한들 그 어느 누가 반론을 하겠습니까?”

그는 오래 전 은장도 박물관을 세울 때부터, 아니 아버지가 은장도 만드는 것을 어깨 너머로 훔쳐 볼부터 ‘은장도’ 하나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전통문화의 한 축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곳은 개인 이익이 아니라 광양시의 공공목적과 전통의 소통을 위한 문화 활용 공간이다.

‘이것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인가?’

올해도 그는 움직인다. 문화재청에서 문화재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융·복합적으로 창출하는 교육·문화·관광산업 프로그램인 ‘2015년도 생생문화재 사업’을 공모했고, 그가 선정됐다. 문화재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문화콘텐츠로 새롭게 창조해 국민과 함께하는 역사문화체험 프로그램 관광 상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깊이 있는 행사에는 사람이 없고, 며칠짜리 자극적인 행사에는 어찌된 연유인지 사람이 몰립니다. 어쩔 땐 내 능력의 한계를 느끼며 회의와 상실감을 느끼는데요. 미련 없이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매일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쉽게 포기 할 수가 없없다. 이유는 한 가지다. 우리 것을 보전하고 살려야 한다는 무거운 마음의 짐 때문이다. 그 짐은 그가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아 평생 짊어져온 것이고, 이제는 자식에게까지 대물림됐다.

몇 년 전의 일이다. 파리에서 전시를 열었다. 준비하는 동안 기대 반 우려 반의 설렘 속에서 살았다. 한국장도문화의 예술성과 한국 장도장의 자존심을 칼 문화가 일상이었던 유럽인들에게 직접 평가 받고 싶었다.

처음으로 가보는 파리 여행길이었다. 도로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건축물이 영화 속 장면과 겹쳐 신기했다. 말 그대로 영화를 찍기 위해 제작된 세트장처럼 보였다. 그가 바라본 파리의 세상에는 새로운 게 없었다. 온통 오래된 것들이 길게 살아남아 지금껏 숨을 쉬었다.

“아! 이 사람들은 전통문화와 예술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민족이구나, 감탄했어요. 부러웠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문화와 예술이 그냥 삶이었어요. 말 그대로 국민모두가 문화 예술인이었어요.”

그가 숙박했던 집도 시간이 오래 담겨 있었다. 100년 이상 된 7층 건물이었다. 그는 전시와 시연행사가 많아 1991년 미국을 시작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다. 그래서인지 각 나라의 문화적 특색을 빨리 파악하는 편이다.

다음날 아침을 식사를 하고 전시가 열리는 프랑스 최대의 박람회장에 도착했다. 각국의 부스가 부산하게 움직였고, 가슴도 뭉클해져왔다. 한국관에서 관람객을 맞을 준비를 했다. 과연 이 나라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드디어 개막 첫날, 반응이 엄청났다. 수 많은 인파가 박람회장에 몰렸고, 12일간의 행사 내내 흥분 속에서 살았다.

먼 이국 사람들의 장도에 대한 극찬은 끊이지 않았다. 극찬의 시작과 끝은 늘 감탄사였다.

“나 역시 처음 자리한 유럽무대인지라 작품 선별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전시목적이 15점, 판매목적이 10점이었는데 거래성사는 전시 목적품 1점, 판매품 10점이었습니다. 첫 유럽무대치고는 대성공이지요.”

그 당시 파리 시내에는 잡화물을 파는 구멍가게가 많았다. 작은 칼들이 전시되고, 판매되는데 전부 생활필수품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 수준이었어요. 고민도 더 많이 했지요. 어떻게 파리에 진출할까? 한국에서 장도는 전통 공예분야 중 힘든 종목인데, 파리는 다른 세상이었고, 장도 장인들의 천국이었습니다.”

30년 가까운 장도 인생 동안 그는 왜 밖을 보지 못했을까? 아마도 자기 안의 애착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다시 뛴다. 그리고 다시 장도의 세상에 몰입한다. 세상은 넓고, 우리 장도의 깊이를 알릴 곳도 그만큼 많다.

프랑스인들은 마음에 드는 장도를 보면 꼭 묻는다. ‘이것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다고 답하면 작품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하고 장인에 대해 존경을 표한다. 답례로 그는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광양 장도의 맥은 계속 이어질 거라고….

대동문화 87호 [2015 3,4월호]

한경숙 기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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