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종(67). 그는 197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당선된 이래 시인으로 활동해왔다. 그래서 그를 ‘시인’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그를 ‘화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다. 그를 서예가로 아는 사람도 있다. 대한민국 동양 서예대전 초대작가, 한국 추사 서예대전 초청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를 두고 “팔방미인이군!”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을 게고 “도대체 몇 우물을 판 거야?”라고 질투(?)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게다. 그러나 그가 시인에서 화가로, 서예가로 자신의 영역을 넓히게 된 계기는 누구보다도 깊은 슬픔과 시련 때문이었다.

수탉이 태양에 덤비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는 대학 시절(조선대 국문학과)에는 총학생회장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했고 20대 후반에는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30대 초반에 모교의 대학교수로 임용되었다. 거침없는 행보였다. 후배들을 가르치고 글을 쓰는 일이 삶의 전부였고 열정과 패기가 넘쳤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큰 충격이고 상처였다. 분노와 원망으로 화를 끓였다. 밖에 나가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었다. 칩거 생활을 하는 그의 등을 아내가 떠밀었다.

“‘이렇게 집에 틀어 박혀서 인생을 다 보낼 거냐? 당신은 활동을 해야 한다.’면서 1천만 원이 든 통장을 주는 거예요. ‘이 돈으로 사무실을 하나 내라’고….”

처음에는 아내에게 미안하여 쓰지 않고 있다가 몇 번 꺼내 썼다. 그때마다 아내는 남편이 쓴 만큼 돈을 채워놓았다. 아내에게 더욱 미안해졌다. 아내를 봐서라도 용기를 내야했다. 사무실을 얻고 광주문인협회 회장으로 활동을 하면서 시를 쓰고 외부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태양에 덤비는 수탉> 시리즈는 바로 이때의 제 마음이라고 할까요. 숫기를 잃어버린 이 땅의 남자들, 패기를 잃어버린 이 땅의 남자들에 대한 위로이자 격려입니다. 수탉은 압니다. 태양에게 덤벼들면 위험하다는 것을. 그래도 달려듭니다.”

백지장 한 장의 차이는 엄청나다

김종은 누구보다도 그림에 대한 안목이 남달랐다. 자신이 그린 그림인 양 화가의 마음을 잘 읽어냈다. 뿐만 아니라 화가들도 자신의 작품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을 해석해줌으로써 작품의 격을 한층 높이고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화가들에게 인기가 많은 평론가(?)였다. 많은 작가들이 전시회를 앞두고 작품평을 의뢰해왔다.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작품을 볼 수 있는 것도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많은 작품을 보고 분석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 정경희 씨(61)가 한국화가로 활동하고 딸이 미대 지망생이라 집안에는 항상 스케치북이며 물감, 4B 연필 등 화구(畵具)가 준비되어 있어 더욱 그러했다.

“어느 날 4B연필로 고목을 하나 그렸는데 아내가 그것을 보더니, 그림을 한번 해보라고 하는 거예요. 한번 해볼까 하고 스케치북 하나 들고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그리기 시작했어요. 한 6개월이나 지났을까요? 아내가 그동안 작업을 한번 보자고 하더니 폭탄선언을 하는 겁니다. 이제 자기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1998년 3월 19일, 그는 그날을 뚜렷이 기억한다. 자신이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날이자 아내가 폭탄선언을 한 날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음악이든 미술이든 배우면 어느 정도까지는 해요. 그러나 ‘누구나 하는 정도’를 뛰어넘는 것, 그것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누구나 하는 정도’와 그것을 뛰어넘는 차이는 백지장 정도죠.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그 차이가 작품의 예술성을 판가름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왔지만 승(勝)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몇 개월을 했는데, 그것도 배우지 않고 혼자 했는데도 저보다 훨씬 뛰어났어요. 타고난 사람이 있구나, 그림은 배워서 하는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보다 남편이 그림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정경희 씨는 남농 허건과 아산 조방원을 사사하고 조선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후 광주수피아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한국화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가 중학교 시절부터 배워왔던 한국화를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을 지지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동안 관심을 가졌던 침선(針線)공예에 몰입하고 싶어서였다. 그녀는 80년대 후반 어머니 윤판임 씨에게 침선을, 송현경 씨에게 자수를 배워 틈틈이 침선공예를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다닐 무렵,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부엌에는 예쁜 상보가 덮인 점심 밥상이 있었어요. 어머니가 여기저기 모양이나 크기가 다른 여러 색의 천 조각을 덧대어 만든 밥상보였죠.”

마을에서 큰일을 치를 때면 손끝이 야문 사람은 마른자리에 앉아 일을 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다. 옷이면 옷, 이부자리면 이부자리, 가방이면 가방, 어머니의 손에 들어가면 어떠한 천 조각이든 마치 화려한 새 예술품으로 다시 태어나듯 변했다. 어머니 옆에는 항상 규방칠우(閨房七友)가 있었다.

“제가 침선공예를 하게 된 데는 어머니 영향이 크죠. 늘 형형색색, 아름다운 천 속에서 살았으니까요. 침선을 배우겠다고 했더니 처음에는 어머니께서 반대하셨어요. 고생스럽다고. 바느질을 하면서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즐거워하는 제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규방 공예, 침선 공예 하면, ‘옛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한 땀 한 땀 장인 정신이 물씬 배어 있으면서도 현대적 미감을 살리고 있다.

“침선 공예는 우선 수공예라는 점에서 유명 명품 브랜드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습니다. 특히 수제품을 좋아하는 외국인들의 취향에 한국적인 색과 조형미가 독특하게 융합되어 침선 공예는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이미지로 쓰여도 손색이 없어요.”

천 개의 달과 천 개의 강을 거닐다

김종은 시인에서 화가로 영역을 확장하고 정경희 씨는 한국화가에서 침선공예가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후 15년이 지난 지금, 김종은 광주를 비롯한 서울, 대전, 대구 등지에서 14번의 개인전을, 정경희 씨는 6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문일지십(聞一知十), 한 가지를 알면 열 가지를 안다고 했다. 시인의 감성이 따로 있고 화가의 시선이 따로 있겠는가. 또 화가의 재능이 따로 있고 침선 공예 재주가 따로 있겠는가. 시가 화가의 세계를, 한국화가 침선공예 세계를 더 견고하고 넓게 해주었다. 즉, 앞선 작업들이 자신의 예술성을 더욱 뿌리 깊게, 더욱 깊은 샘을 만들어 준 것이다.

김종 부부는 생각이 막힐 때 걷는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보면 일상의 것들이 새롭게 보이고 그 새로움은 또 다른 새로움과 아이디어로 이어졌다. 모든 물상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세포 상태로 분해되고 해체된 다음 재구성되었다. 어떨 때는 그 고뇌가 잠자리까지 파고들었다.

김종의 <산이 된 사람들>, <월인천강을 거닐다>는 바로 꿈속 본 풍경을 형상화한 것이다. 특히 <월인천강을 거닐다>는 하늘을 강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천 개의 달을 띄운 500호 대작이다. 김종은, 아내이기 전에 자신의 첫 번째 독자요 비평가이고 도반인 정경희 씨와 함께 하늘에 천 개의 달을 띄우고 맨발로 걷는다.

“예술하는 사람으로서 이 날까지 우리 부부는 방황과 궁리만을 반복하는 세월이었다. 허나 언제까지나 ‘신인일 수만 있다면’ 우리 작업은 성과에 관계없이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대동문화 89호 [2015 7,8월호]

정명혜 교수 남부대 언어치료청각학과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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