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쇠 날처럼 쏟아져 내리던 날 박병우 화백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의 작업실이 있다는 담양으로 가는 길은 그악스런 햇빛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사과를 그리는 화가. 왜 사과를 그리는지, 그에게 사과는 어떤 의미인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내비게이션이 가리켜주는 대로 달려가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더위 한가운데서 화백을 만났다.

처음 만난 화가 박병우 선생의 인상은 편안해보였다. 박 화백을 따라 햇빛을 뒤집어쓰며 그가 작업실로 쓰고 있다는 작은 농가로 향했다. 말쑥한 차림의 화가처럼, 집도 말끔하게 치워져있었고, 단아했다.

마침, 서울에 있는 화랑에 작품을 보낼 일이 있어 작품들을 꺼내놓았다는 화가의 말대로 그의 작품들이 땡볕에 나와 있었다. 집의 한 벽면을 가릴 만큼 대작이었다. 혼자 그 대작을 꺼냈을 화가의 수고가 짐작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온통 땀으로 뒤발해 있었다. 하지만 그때처럼 또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작품들이 인정을 받는다는 거. 그 시간이 있기에 화가는 혼자 그렇게 외로운 시간을 견디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땡볕에 탐스런 사과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디 한 곳 흠이 없는 빨간 사과는 물기를 머금은 채 그렇게 싱싱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로 박병우 화백의 작품 속 사과였다.

일명 그는 사과화가다. 사과를 즐겨 그린 탓에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이다. 박병우 화백의 사과는 부사품종이다. 붉은 빛을 지닌 다디단 맛의 사과. 보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침이 고이고 코끝에 사과의 달큼한 향이 감도는 듯하다.

불속에서 긁어낸 극사실주의 그림들, 사과만은 아냐

하이포 리얼리즘. 거의 실물이나 다름없는 그림들을 하이포 리얼리즘으로 구분한다. 극사실주의인 것이다. 박병우 화백은 하이포 리얼리즘 계열에 속한다. 정말, 박 화백의 사과를 보고 있노라면 그림 같지가 않다. 차라리 사진에 가깝다. 과육 표면의 매끄러운 느낌이나,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물방울과, 가지의 거친 질감까지, 사실적이다.

하긴 박병우 화백이 사과만 그리는 것은 아니다. 붉은 동백도 있고, 설송도 있고, 누드도 있다. 붉은 사과거나, 붉은 동백이거나, 설송이거나, 누드거나 그의 작품은 모두 극사실주의 그림들이다.

만지면 실재할 것만 같은 그런 작품들. 왜 그는 이렇게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그림에만 매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헌데 어느 날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림 좀 어떻게 해봐라. 딱 그 말만 하시고는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그림 좀 어떻게 해봐라. 아버지의 말은 화가에게 여러 가지 감정을 불러왔다. 미안함과 죄송스러움, 그리고 자괴감까지. 화가는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아버지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농기구들과 농작물들을 보관해야 할 창고가 화백의 작품금고로 쓰이고 있었으니 아버지가 겪었을 불편함을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편해도 아무말씀 하지 않으시고 그 불편을 참고 계시던 아버지가 그림을 어떻게 해보라는 말씀에 화가는 그길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창고에 켜켜이 들어있던 그림들을 꺼냈다. 그림들은 참으로 많았다. 그동안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그림에만 매달렸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들을 다 모아두었으니 적지 않은 수였던 것이다.

그 그림들은 과거 박병우 화백 자신이었다. 한때의 방황과 열정과 애정이 고스란히 그 그림 속에 들어있었다. 그렇게 지나온 과거를 마주한 화백의 머릿속으로 그때의 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미래역시 기약이 없었다.

화백은 불을 피웠다. 그리고 하나하나 작품을 그 불속에 내던졌다. 그렇게 불 속에서 화가의 한 시절이 타올랐고 사라져갔다. 그것은 제의였고, 자신을 찾아가는 하나의 의식이기도 했다. 화백은 너울거리며 타오르는 그 불의 춤을 보면서 우울했다.

헌데 차마 그 불구덩이 속에 던지지 못하고 한 점 씩 한 점 빼놓은 것을 추슬려보니 대부분이 극 사실주의 그림들이었다. 거기서 박 화백은 깨달았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고, 즐겨 그린 그림이 무엇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제야 제가 가야할 길이 보였습니다. 그때 찾았던 길을 지금 가고 있는 것이지요.”사실 학교 다닐 때 화가는 크로키부터 시작해 하루 열다섯 장이 넘는 그림들을 그리면서 화가로서의 기본기를 익혔다. 그리고 이런저런 습작들을 하는 동안극사실주의 그림도 그렸다.

창고를 가득 채운 그림들을 불태우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냈듯 화백은 가끔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기를 찾는 습관이 있다. 과거와 마주하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스승은 농사꾼인 아버지

극 사실주의는 다른 그림에 비해 그리기가 더 까다롭고 힘이 들며 시간이 더 소요된다. 일일이 하나하나 세밀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화백을 보고 주변에서는 말한다.

“대충 뭉개버려.” 작은 부분하나도 그대로 재현해내려고 애쓰는 화백의 모습이 조금은 갑갑해보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백은 그게 안 되었다.

박 화백은 지나리치리 만큼 자신에게 엄격하고 성실하다. 그러기에 어쩌면 화백만이 그런 극사실주의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사과를 그리기 위해 그는 수없이 많은 사진을 찍는다. 그가 작업실로 쓰는 방 옆의 또 다른 방 하나에는 온통 사진자료로 가득하다. 수없이 많은 사과들이 번호가 매겨진 채 상자 안에 담겨서는 빼곡히 정리돼 있었다. 실사지만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그냥 보기에는 크기도 같고 빛깔도 같고, 모양도 같지만 화백의 눈에는 그 하나가나가 다 다르다.

어떻게 그는 그림에 입문하게 되었을까? 진도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그가 다니던 학교 앞에는 화랑이 두 개가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는 매일 학교를 오가면서 그 화랑 앞을 지나쳤고, 화백은 그냥 무심히 그 화랑을 지나칠 수 없었다. 매일 보던 그림이었지만 매번 그 그림들은 화백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화백은 한동안 그 그림들을 보고 서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을 볼 때마다 무언가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저렇게 그렸을까? 나도 저렇게 그릴 수 있을까?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는 진도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미술부에 들었다. 그리고 점점 더 그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처음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을 때 그의 부모는 그의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환영해주었다고 했다. 네가 하고 싶은 거 열심히 해봐라. 격려해주고 응원해주었다. 의외였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예술을 한다고 했을 때 예술의 길은 배고프고 험하다며 반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화백의 부모는 오히려 기뻐하고 적극적으로 응원까지 해주었던 것이다.

“헌데 그것이 오히려 제게는 부담이었습니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으니까요.”

사실 아버지의 꿈이 화가였다고 했다. 헌데 그 꿈을 접고 농부의 삶을 사신 다. 화백은 아버지가 그린 그림을 보았다. 아버지는 수줍게 당신이 그린 그림을 화백에게 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화백의 그림에 대해 비평가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비평은 그림 그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가 그러셨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그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 말씀이 진리구나 라고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그림을 권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자신들이 하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이 길이 너무 힘들어 자신의 아이들은 다른 길을 갔으면 했다.

그 말은 곧 고백이었다. 이 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독하고 외로운지 화백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진도중학교를 나온 그는 미술의 명문 조대부고로 진학했다. 조대부고 미술반 활동할 때 그는 참으로 많은 습작들을 했다. 수업이 끝나고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하루 한 점씩 그려야 하는 미술부에서의 시간은 화백을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그때 은사님은 김병모 선생님이셨다.

그렇게 열심히 그림을 그린 화가는 조선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아직 화백은 자신이 추구해야 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다. 스승들이 시키는 대로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들며 다양한 세계를 쌓아나갔다.

그저 열심히만 하면 나중에 좋은 화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는 있었다. 화백은 성실했고, 아직 열정이 있을 때였다. 그 성실함이 녹아들고 돋보이는 것이 결국 극사실주의의 그림들이다.

사과와 여인의 누드가 겹쳐 아프로디테를 연상케 해

화백이 즐겨 그린 소재들 가운데 사실 내 눈에 더 들어오는 것은 설송이었다. 한 겨울 눈밭에 청정하면서도 올곧은 기운으로 서있는 소나무. 눈 쌓인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서있는 소나무는 그 기상을 잃지 않고 꼿꼿하고 푸르게 서있었다.

그림은 그린 이의 심성을 닮는 법인데, 박 화백의 기상이나 심성이 그 설송 같을 것이다. 하여 자신과 타협하지 않고, 극사실의 사과를 그리고 동백을 그리지나 않은지. 헌데 그에게는 극사실의 소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누드다. 박 화백의 누드는 사과만큼이나 향기롭다. 사과와 여인의 누드는 어쩐지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세상에는 유명한 사과가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뉴튼의 사과요, 하나는 아프로디테의 사과이며, 하나는 이브의 사과라고 했는데, 사과와 여인의 누드가 겹쳐지면서 아프로디테를 생각나게 하고, 이브의 사과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누드는 착해 보인다.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리는 이니까 열심히 그림을 그려야지요.” 나는 다시 정정해 물었다. 화풍에 변화를 줄 생각은 없냐고.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제가 가장 잘 그리고 저에게 맞는 그림은 극사실주의 그림이니 이걸 계속 발전시켜 나갈 예정입니다. 하지만 삶은 알 수 없는 거니까 또 모르지요. 무언가 영감이 떠오르면 바뀌어 질 지도요.” 나는 영감이 떠올라 달라질 화백의 그림을 기대했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이 눈이다. 설빙. 눈의 입자가 --그저 감탄사---한다.

대동문화 96호 [2016 9,10월호]

은미희 소설가  webmaster@chkorea.news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