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참 성실해.’ 그 말을 듣는다는 것은 잘 살고 있다는, 큰 어려움 없이 그만그만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성실’만 하면 그래도 살 수 있는 시절에는. 그러나 요즘은 ‘성실’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단다. 그럼 뭐가 더 필요할까? ‘열정’이다.

모 기업가는 ‘이삼십대를 성실하게만 보내면 40대 이후에 크게 후회할 가능성이 높다. 성실은 기본이다.’라고 하면서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강조한다. 그럼 성실과 열정만 있으면 될까? 또 그렇지 않다. 열정의 방향을, 궤도를 잘 잡아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교집합을 잘 찾아내는 것이 열정의 방향을 잡는 것이다. 그것을 찾았다면 미쳐야 한다.

나는 소리에 미쳤다

정준찬(69)과 최미순(49)은 판소리꾼이다. 그들은 일찌감치 자신들이 무엇을 좋아하는 줄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하고 싶었다. 거기다 부모로부터 ‘소리’ 유전자와 ‘끼’까지 물러 받았으니 출발 자체가 축복 받았는지도 모른다.

고흥이 고향인 정준찬씨의 아버지는 인근 동네에서 알아주는 소리꾼이었다. 회갑 잔치를 비롯하여 웬만한 잔치에는 아버지의 소리가 판을 뒤흔들었다. 어머니 또한 목이 좋았다. 정준찬씨는 그런 부모의 무릎 위에서 소리를 배웠다.

“참 이상했어요. 저는 책을 보면 두 줄도 못 읽어서 잠이 잘 정도로 공부 하는 게 싫었고 기억력도 없었어요. 우리가 다닐 때는 국민교육헌장이라고 그것을 무조건 외워야 했는데 그것도 외우지 못해서 늘 혼났거든요. 그런데 판소리 가사는 그냥 술술 외워지는 겁니다.”

스무살 무렵 그는 본격적으로 소리 공부를 하기 위해 공대일씨(공옥진의 부친)를 찾아갔다. 그것을 시작으로 백남희, 조상현 명창으로부터 심청가와 흥보가, 수궁가, 춘향가 등을 사사 받았다. 그렇게 20여년 공부를 한 그는 광주에 판소리연구소를 열어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한때 소리를 떠나있기도 했다. 소리를 할 때마다 목에서 피가 나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폐렴인가 걱정도 했다. 다행히 폐렴이 아니라 목을 무리하게 쓰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치료법은 소리를 하지 않는 것. 20여 년 동안 오직 좋은 소리 만들겠다고 달려왔는데 이게 왠 날벼락. 일단 몸을 추스르기로 했다.

흥양예술단원들의 연습장이자 그의 작업실인 담양군 무정면에 집을 마련한 것도 이즈음이다. 그곳에서 선비처럼 살았다. 서예를 하고 한국화를 그리고 불경을 읽었다. 그런데도 몸무게가 45kg까지 빠졌다. 병명도 나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굿도 했다. 그런 차에 우연히 들렸던 한 식당에서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판소리’식당이라는 간판에 이끌려 들어갔는데 식당 주인 왈, 자신이 소리를 좋아하는데 배우지 못해서 상호를 그리 붙였다는 것. 그 말을 들은 그는 주인장에게 공짜로 소리를 알려주겠다고 손을 내민 것. 그것이 계기가 되어 소리를 다시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건강이 좋아진 것이다.

“그때 확신을 했죠. 내가 갈 길은 이 길이구나. 사업을 해도 안 되고 쉬어도 몸이 아픈데 소리를 하면 좋아지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니까, 내가 그것이면 미칠 수 있으니까 그러지 않나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으면, 자기가 좋아하면 다 합니다.”

그가 소리에 빠져 산 50년 중 30년은 배움의 시간이었다면 20년은 나눔의 세월이었다. 연구소에서 함께 공부를 하던 지인들과 보리마음국악봉사단을 만들어 요양원, 복지관, 보육시설, 마을 회관 등을 찾아다니면서 판소리 재능기부를 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보리마음국악봉사단은 2007년 흥양예술단(단장 정준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열정의 무한궤도

최미순씨가 정준찬씨를 만난 것은 20여년 전 한 국악경연대회장에서였다. 대회에 출전한 그녀의 소리를 듣고 정준찬씨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목(소리)이 좋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첫 인상은 옆집 아저씨 같이 편안했지만 불쌍할 정도로 안 좋아보였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동안 해왔던 공부를 쭉 이야기 하시면서 소리 공부도 하고 봉사도 하자고 하시는데 공부를 같이 하자는 말씀에 마음이 갔어요.”

최미순씨가 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이다. 텔레비전에서 본 조상현 명창의 소리에 반해서 ‘크면 꼭 저 선생에게 노래를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가 판소리에 귀를 빨리 열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가족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의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고흥에서는 알아주는 소리꾼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불을 때면서도 부지깽이로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불렀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저년이 부뚜막 다 썰어먹는다’며 소리 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끼는 막을 수 없었다.

성인이 된 그녀는 직장을 다니면서 소리 선생을 찾아다니면서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 정준찬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소리’에 대한 열정 하나 부여잡고 정준찬씨는 50여년을, 최미순씨는 30여년을 달려왔다. 20여년 전에 처음 만난 이들은 흥양예술단을 창립(2007)하여 지금까지 700여 회 판을 펼쳐왔다. 정준찬씨가 심봉사를 맡으면 최미순씨는 뺑덕어미로, 때로는 곽씨부인으로 그와 합을 맞췄다.

“흥양예술단에 상주하는 단원이 일곱 명인데, 무대를 창극으로 꾸리다 보니 노래도 하고 연주하고 무용도 하지요. 일인 몇역을 합니다. 연출자, 기획자도 따로 없어요. 기획에서부터 공연 마무리까지 우리 단원들이 다 달려들어서 해요. 무대장치, 음향, 조명, 분장, 의상까지 모두. 그러다보니 어려움이 많죠.”

흥양예술단은 전국 방방 곳곳,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장소에서 공연을 하지만 그들의 공연은 대부분 재능기부이다. 그러다 보니 공연에 따른 수입이 거의 없다. 오히려 요양원, 복지관, 양로원 등을 찾을 때는 간식거리를 준비해가기도 한다.

재능기부는 분명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지만 젊은 친구들에게 끝까지 같이 가자고 할 수 없어 그들이 예술단을 떠날 때는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소리꾼이, 춤꾼이, 연주자가 흥양예술단을 거쳐갔다. 그러나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정 단장과 호흡과 보폭을 맞추는 이가 최미순씨다.

“선생님으로부터 소리 뿐만 아니라 인성, 삶을 배우죠. 소리가 익으려면 50은 넘어야 한다면서 평생 배워야 한다, 배움에는 촌부나 아이한테도 배워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죠. 그리고 예술인의 품격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을 해주시죠. 공연 후 뒤풀이에서는 와이담이며 거친 말들이 쏟아지죠. 선생님은 그것을 아주 싫어해요. 무대에서는 끼를 다 부려도 무대에서 내려오면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고, 그것이 아름다운 예술인이라고. 선생님은 술을 한 잔도 못 마셔요. 그런데도 말 술 마신 사람보다 더 잘 놀고 재담이 있으시죠.”

정준찬씨는 글쓰기를, 또 작곡을 배운 바 없지만 대본도 쓰고 작곡도 한다. 그는 좋은 시가 있으면 그 시를 오랫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떠오르는 운율대로 노래로 부르면 작곡가들이 그 노래를 듣고 악보로 채록한다. 그가 요즘 구상하고 있는 작곡은 <선비가>와 <지리산 10경>.

“내가 선비가 되는 거죠. 또 내가 있는 곳이 지리산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느낌이 어떤가, 그 풍경이 어떤가를 상상하고 느껴보려고 노력해요.”누군가는 그런 그를 천재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재주는 천재성이기보다 집중력이고 열정이고 관심이다. 작곡이든 대본이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밥을 먹으면서도 걸어다니면서도 그 생각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 집중력이 50년 소리를 해오게 했고 20여년 문화나눔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소리꾼 정준찬과 최미순.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또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를 분명히 찾아냈고 그것을 향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열정은 무한궤도이다.

대동문화 98호 [2017 1,2월호]

정명혜 교수 남부대 언어치료청각학과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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