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회남 화가

흰 눈이 펑펑 쏟아질 것만 같은 12월 초순 어느 일요일, 허겁지겁 나갔다. 다음 주 토요일에 남양주로 출장을 가 만나기로 돼 있었던 취재원이 광주에 내려왔단다. 자다가 꿀떡을 얻어먹는 격이었다. 그이는 다름 아닌, 중앙화단에서도 잘 나가는 이 지역 출신의 화가 정회남선생이다.

그가 갑자기 광주는 왜?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약속장소로 갔다. 영암 고향집에서 김장을 하는 날이라 손을 넣어주러 오는 길에 들렀다는 그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서 반갑게 맞이한다. 그리고 시크하게 대꾸한다. 뭐, 취재할 게 있다구.

화단에서 잘 나가는 작가라면, 두 부류가 있다. 작품성 높은 작업을 하는 작가와 작품을 잘 파는 작가가 바로 그것이다. 소위 잘 나가는 작가에 해당되는 정선생은 두 영역의 교집합에 서 있는 드문 이가 아닐까. 복 받은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선산을 잘 썼든지.

최근의 작품을 보자. 담백하다. 담백하다 못해 절제의 미학이 뚝뚝 묻어난다. 색상이나 구도 나 모두 결기 있게 담백하다는 필자의 말에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인한다. 화사한 것도 있다는 것. 아무리 보아도 화려한 것과는 애시 당초 거리가 멀 것 같은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먼 시절 했었던 전시회 도록을 내놓는다.

우와, 거칠고 선이 굵으면서 원색 페스티벌이다. 다소 거친 듯 휘몰아치는 야생적인 구도, 거기다 원색의 색감이 어우러지는 저편을 훌쩍 건너 뛰어 담백함을 연출하다니, 상당한 내공이다. 그 내공의 힘이 오늘 화면 여기저기에서 팍팍 솟구친다.

다녀온 외국의 풍물과 흔적들이 나열식으로 그림 속에 배치됐다. 구도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배치 아래 시간과 공간이 다른 일들이 한 화면에 그려졌다. 강에서 대나무 뗏목을 타는 사람들, 가미우지 물고기를 잡는 어부, 계림시대의 사원과 조형물, 식물들, 과일을 파는 사람들, 그리고 역시 작가 자신의 모습도 슬쩍 끼어들었다.

그림의 소재는 여행을 통해서 보고 감흥을 받았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수 십 년간 다녔던 나라만 해도 헤아릴 수 없다. 정선생은 이 점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언젠가 동창들 모임에서의 일이다. 마침 전시회를 앞두고 있어서 리플렛을 나눠주는 그더러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정말 행복한 삶이야, 우리도 저리 살아야 하는데...”하며 부러워했다. 의사, 변호사, 세무사 등 사회적으로 잘 나간다는 그들이었다. 경제적으로 빠듯한 살림에 언제나 그 친구들이 부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역공을 당한 셈이다.

그들은 오직 개미처럼 열심히 일해서 자유시간이 없다고 했다. 설령 돈과 명예가 있다고 하더라도 즐겁게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행복하지 않겠냐고 항변했다.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정말 그랬다. 하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그 소재를 찾아 여행을 다니고 스스로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고...

언젠가부터 그는 떠나고 싶을 때 무조건 떠났다. 한푼 두푼 모아서 여행을 갔고, 그도 안되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떠났다. 여행이 단지 여행의 기쁨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에겐 다시 창작의 원천이 돼 그림으로 연결된다.

보통의 사람들로선 평생에 걸쳐 한두 번 조차도 쉽질 않을 해외여행을 그는 밥 먹듯 드나든다. 그것 없이는 숨을 쉴 수 없고 창작도 어려우니, 어찌하랴. 창작의 필수요소가 아닌 생존의 필수요소가 돼 버렸다.

좋겠다, 부럽다, 좋겠다, 부럽다... 좋아 보이면서도 괜히 시샘이 나는 그런 애매한 상황에서 인터뷰가 계속 이어진다.

“꼭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인생관을 정하고 실행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정말 그렇단다. 경제적인 형편이 넉넉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갔었다. 그렇게 다니길 수년 여. 길고 긴 터널과 같은 상황에서 여행의 결과물이 그림으로 나왔고 그 그림은 적잖은 반응을 일으켰으며 다시 여행을 갈 수 있는 터전이 돼주었다.

그의 그림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세계를 만난다. 하나는 그가 발로 딛고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낀 감동과 인상을 붓으로 옮긴 세계다. 또 하나는 회화의 질서를 그만의 조형언어로 재구성해내는 의지의 세계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의 작품성은 밀도 높게 끌어올려진다.

은밀한 갈등의 싹이 튼다

그의 발길은 세계 곳곳을 누볐고 누비고 다녔던 흔적은 고스란히 캔버스에 옮겨졌다. 그만의 조형 질서를 가지고. 중국 윈난성의 방석 무늬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보았던 전통춤의 화려한 의상이, 시리아 사막의 페드로 유적이, 강렬한 태양아래 빛났던 흑단의 피부가 캔버스로 옮겨와 재구성됐다. 눈으로 보았으되 감성으로 포착되고,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표출되는 조형세계가 자리를 잡는다. 나이프 터치의 거친 맛 대신 붓 터치로 표현의 정교함을 더한다. 나이프 터치에선 주제와 배경이 행복한 친화관계를 이뤘다면, 여기에선 보이지 않는 은밀한 갈등의 싹이 튼다.

갈등이라, 그게 없다면 작품의 힘아리는 뚝 떨어져 버릴 게다. 그냥 그냥 널어지고 아무 질서 없이 펼쳐진, 그가 챙겨온 세계 곳곳의 흔적 나부랭이들이 그 나마의 긴장감을 가지고 화면에서 위상을 발하는 것은 다 그 갈등 덕분이다.

그 갈등은 단순함 속에서 빛을 발한다. 따라서 색감은 단조로운 듯 통일되고 구도도 나름대로의 정연한 구도 속에서 흘러간다. 복잡다단함 속에서 갈등은 뚜렷이 표출되지 않는다. 어지러움 속에선 피아가 구분되지 않고, 여럿 속에서 자질구레한 대립은 그저 애교정도의 해프닝에 그치고 만다. 평화스런 공존과 대등 속에서 은근히 다가드는 갈등이 그의 작품에서 빛을 발한다.

그의 예술세계가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은 ‘작업은 아날로그, 출력은 디지털’이라는 점이다. 첨예한 프로세스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작가의 감관을 통해 포착된 소재의 인상은 아날로그의 기재와 방식이다. 아날로그 출력을 거친 후 그 출력물을 통해 추체험을 일깨우면서 작가의 화려한 표현력과 장식욕구가 디지털로 화한 제2차 출력물로 변조돼 폭발적인 표현으로 화한다. 내면에서 분출하는 표현과 장식적 욕구가 실시간으로 화면에 쏟아지는 과정에서 아날로그방식의 방증자료가 미처 뒤따르지 못하는, 이를테면 시차 부적응현상이 화면의 디지털화를 가속화시킨다.

용암처럼 분출하는 그의 디지털 출력 프로세스는 화면에서의 성취와 함께 관객을 주도하는 스타일의 완성으로 나아간다. 관객과의 소통이 쉽지 않은 이국정서조차도 자생적인 질서와 한국적인 정서로 껴안는다. 그에게 관객과의 타협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관객은 사람들이 아니라 시대정신과의 타협이고 그것은 이미 자각의 세계가 탄탄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일이다.

보고 느낀 세상만사의 풍물과 흔적들이 그의 붓질로 조형화되다

정선생에게 이국정서란 현상소에서 출력된 사진처럼 자기화한 아날로그적인 수단으로 비친다. 어느 문화권이건 고유문화라는 것이 있고 사람들에게 익숙한 어떤 고유정서와 위배된다고 여겨지면 그것은 이국정서로 치부된다. 그 이국정서는 작품의 관상, 향수, 소장에 이르기까지 작품에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는 장애요소거나 필요악 같은 것이다.

그 자기화의 방식으로 정선생은 몰입과 이시동도(異時同圖)의 시각을 동원한다. 이시동도란 다른 시점의 사건을 하나의 화면에 그린다는 뜻이다. 여행을 하는 곳마다 작가는 그 나라의 삶과 예술의 방식에 빠져든다. 아프리카에 가면 아프리카에 빠지고 남미에 가면 남미에 빠진다. 시리와와 요르단의 사막에 갔을 때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촬영했던 붉은 사막이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낙타와 산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강렬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먼저 색채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색채는 끝없는 사막이었다. 사막 위에서 페트라의 유적, 대상, 낙타, 바위산을 구성했다.

거기엔 원근법이 무시됐다. 하나의 화면에 여러 장소의 여러 시각이 표현된 것 같은 이를테면 이시동도의 시각이 나타난다.

정선생에게 다른 시각과 인상으로 본 장면과 장면을 연결하는 고리는 배경이다. 단순화한 배경은 그에게 너무나 현대적인 그림이라고 찬탄했던 키리히스탄의 동굴벽화나 암각화처럼 숱한 공간적 궤적과 수 만년 시간이 농축돼 있다.

그는 전남 영암 신북 출신의 촌놈이다. 아니, 양반가의 자제다. 아버지는 향교 전교출신의 유학에 투철한 이다. 초등학교 때 광주로 유학 보낸 교육열이 뜨거웠던 그이의 아버지는 정작 그가 그림을 그린다고 했을 때 담담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트인 분이셨다.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부원으로 활동했다. 스승은 오건탁 선생님이시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가 존경해마지 않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광주에서 활동하던 그가 1991년 불현듯 서울로 떠난다. 왜? 어린 나이에 공모전을 휩쓸었다. 광주시전, 무등 미술대전, 목우회전에서까지 대상을 거머쥐었다. 소위 잘나가는 신인이었다. 한마디로 기고만장했다. 서울로 가보자는 주위의 권유에 아무런 대책 없이 짐을 싸고 떠났다. 서울은 만만치 않았다. 내려오고 싶은 마음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찌어찌하다가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아줌마들을 대상으로 한 미술교실을 하면서 화실을 운영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려들었는지 모른다. 전시회의 반응도 좋았다. 그 때 벌었던 돈으로 남양주에 궁전 같은 작업실도 마련했다. 물론 10여 년 전부터는 화실경기가 뚝 떨어졌지만...

“전 아등바등 살지 않아요. 호탕, 호쾌, 유쾌하게 지낸답니다.”

그게 인생을 살아가는 모토다. 돈이 있어서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라 여행을 가고 싶으면 짐을 싸고 떠난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뽑아내고 굳혀냈다.

오늘 그가 어느 곳을 밟느냐에 따라 내일 그의 캔버스의 다양성이 보장된다. 그가 보고 느낀 세상만사의 풍물과 흔적들이 그의 붓질로 조형화되고 있다.

대동문화 68호 [2012년 1.2월]

글=김영순 광주문화재단, 사진=최옥수 기자  webmaster@chkorea.news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