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전통을 ‘옛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전통의 본질적 개념은 절대 그게 아니다. 그때그때의 흐름과 변화를 외면하고 정립될 수 없는 게 전통이다. 머물러 있거나 고여 있어선 안 되는 거다. 오히려 혁신적인 변화를 껴안아야 한다. 애오라지 과거에 머물지 않고 계속 변화를 보듬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움을 틔워야만 ‘전통’으로서의 질긴 생명력을 얻어 장구한 세월을 버틸 수 있게 된다. 머묾의 미학에 변화의 미학이 보태어졌을 때 전통은 비로소 시대를 관통한다.

전통엔 변화의 에너지가 중요하다. 이 변화의 에너지를 집어넣어 전통의 개념 정립을 새로이 하고 이를 기획전으로 풀어내 일반인들이 갖기 쉬운 전통에 대한 고리타분함에 가까운 선입견의 틀을 벗겨내고 있는 이가 있다. 9월5일부터 11월 11일까지 의재미술관에서 ‘변화란’ 전을 개최하고 있는 한국화가 직헌 허달재가 바로 그이다.

전통과 변화에 대한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조부인 의재 허백련 선생이 늘 주장했던 “전통을 배우고 익히다 보면 변화가 스스로 찾아온다”는 화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변화 후에 나타나는 전통, 그리고 다시 계속되는 변화, 그 변화와 함께 자리 잡은 전통의 연속은 언제까지나 계속된다고 믿고 있다. 그렇듯 전통과 변화는 서로 변증법적인 관계로 물고 물리며 진전되어 가는 게 아닐까.

변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그이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전시회가 준비된다기에 서둘러 미술관을 찾았다. 콸콸, 콰르르…. 엊그제 내린 폭우의 기세가 바위틈에서 그대로 늦여름 독기로 남아 사나움을 안기는 계곡의 음향 효과가 다소 거칠다. 그 계곡을 끼고 돌며 난 좁은 도로를 따라 증심사 초입에 위치한 의재미술관으로 올라간다.

초겨울 서늘한 기가 가득했던 지난 번 방문 때완 주변이 대조적이다. 성하의 기운이 꺾였음에도 여전히 내리꽂히는 햇살을 간단히 막고선 숲길을 단숨에 차고 올라 찾아든 미술관은 문을 닫은 채 평화롭기 그지없는 정취를 품고 있다.

“주인장! 계신가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입안 오물거림으로 물으며 미술관 안팎을 서성이는데 저 안쪽에서 사람들 서너 명이 몰려나온다. 그 가운데서 뭔가를 지시하고 설명하던 직헌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반긴다.

전시장에 작품을 어떤 위치에 디스플레이할 것인지는 물론 작품 설명과 작품 타이틀을 어떻게 표시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짚어보고 또 확인한다.

전시가 임박해지자 몸도 마음도 함께 바빠진다. 며칠 전 중국에서 귀국해 온통 이번 기획 준비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물론 한 달 여전 중국으로 가기 전 미술관 스탭들과 얼추 정리했건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새로운 진정성만이 예술가를 구원한다

이번 전시회에 그가 유별나게 신경 쓰는 것은 다름 아닌 광주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열리는 기획전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경쾌함과 발랄함을 뛰어넘어 가벼움과 변덕스러움, 그래서 생명력이 짧을 수도 있는 현대미술의 경연장이라 할 비엔날레를 찾은 이들에게 전통과 변화의 관계를 건강한 관점에서 보여주고 싶은 생각에서 뚝심 있게 밀어붙인 전시회다.

“작가의 작업을 항상 새로워야 하고 그 속에서 전통이 자연스럽게 변화를 가져와 자기만의 색깔로 나타나는 진정성이야말로 예술의 치열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단호하다. 변화의 진정성을 동양적 표현과 서구적 방식의 창작물을 통해 찾아보고 자문해보는 기회로 이번 전시회를 활용하려 한다. 따라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현대 미술가들의 작업과 혁신에서 전통으로 변화해온 남종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 선생의 작품을 동시에 선보인다.

한국 미술판에서 이름 석 자로 벌써 그 무게감이 팍팍 느껴지는 이들을 초대했다. 사진작가 배병우와 설치작가 전수천이다. 이들과 직헌 자신이 함께 참여해 3인 전으로 꾸민다. 그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 전통으로부터 변화를 추구해가는 작가들의 사고와 철학을 느끼면서 ‘무엇이 변화인가’를 묻고 답하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3인 전에 그치지 않는다. 2부 ‘감성’ 전을 통해 지역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작가 4~5명의 다이내믹한 창작 세계를 소개한다. 주변 자연과 조화를 이룬 의재미술관의 외부 공간에 작품들이 설치된다. 관람객들은 미술관 내부에서 ‘변화란’ 전을 외부에서 ‘감성’ 전을 보게 된다.

소탈한 여유와 품격 있는 사유의 향기로움

직헌은 남종 문인화의 대가인 의재 허백련 선생의 장손자다. 그의 그림은 재현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선비들의 사의 정신에 기초한 남종 문인화를 현대적으로 조형화시키는 데 관심이 많다. 이는 호남 지역 화단의 종주격인 의재 선생의 예술 정신을 잇는 행보다.

지금에야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그의 현대적인 조형 작업에 대해 주변에선 말이 많았다. 의재 선생의 손자가 왜 딴 짓이냐고. 억울했다.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벗어난 적이 없었건만…. 스승이었던 할아버지께선 “그대로 답습하고 모방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정신을 닮아야지, 외관만을 좇아선 안 된다”는 게 할아버지의 일관된 지도 방침이었다.

의재 선생의 그림이 좋았다. 할아버지여서가 아니다. 다양한 필법과 붓놀림을 따라 하노라면 많은 공부가 됐다. 추사 김정희의 그림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명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림 공부하는 이가 따라 그리기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에 반해 의재 그림은 접하면 접할수록 무궁무지한 필법과 조우하게 된다. 그래서 배우는 이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그가 아직도 의재 선생의 그림을 즐겨 모사하는 이유다.

늘 새로운 모험과 시도를 즐기면서도 일정한 간격으로 다시 할아버지에게로 돌아와 자세를 바로잡는다. 그럴라치면 아무리 휘둘러대도 천박하거나 잡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효과를 거둔다.

직헌은 그렇게 다듬어내고 걸러낸 한국의 절대 미감을 세계인을 향해 내놓는다. 지난 2006년 4월 박여숙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것을 비롯해 북경, 상하이 아트페어, 북경 비엔날레 , 멜버른 아트페어, 쾰른 아트페어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으며 북경에선 정기적으로 개인전을 치르고 있다. 얼마 전부터 아예 1년 중 절반을 북경에서 작업하며 지낸다. 단순한 붓질에서도 깊이 있는 사유 세계가 펼쳐지고 때 묻지 않은 품격이 우러나오는 것은 순전히 전통과 변화를 적절히 잘 아울러내는 그의 재기 발랄함에 기인한다.

초창기 구름을 형상화한 그림, 2000년대 중반 문자를 반복해 율동감 있게 그린 그림, 그리고 바람에 흩날리는 난 이파리 그림 등은 누가 보아도 세련된 현대적 조형 감각이 잘 버무려진 작품들이다.

그것은 저절로 나오지 않았다. 5, 6세부터 할아버지 무릎 제자로 전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올곧은 예술 정신을 이은 그가 혹독한 자기 수련을 거쳐 나온 것들이다. 할아버지께서는 “농담을 강하게 쓰면 눈에 쌈박하게 들어오긴 하지만 처음에만 ‘쎄’할 뿐 진득하게 붙잡는 맛이 없다”며 그런 그림을 자제하라고 가르치셨다. 중간 톤의 드러나지 않고 들뜨지 않는 농담 속에서 은근히 나오는 호소력, 그것은 의재 선생의 가르침과 끝없이 이어진 자기 질문과 대답 속에서 가능했던 부분이다.

화가, 경영자, 기획자 등 1인 다역 거뜬히

직헌은 자기 그림 작업에만 몰입하는 그런 팔자를 타고 나지 못했다. 의재 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 할아버지께서 가꾸셨던 차밭을 경작해 춘설차를 만들어낸다. 더불어 의재미술관장으로서 미술관 운영과 전시회 기획과 진행도 이끈다.

한 몸에 여러 지게를 동시에 지고 일어설 뿐 아니라 때론 달음질을 쳐야 하는 세월을 살고 있다. 그러나 불만의 볼멘소리를 접고 주어진 일에 묵묵히 임한다. 그림을 그리며 차를 가꾸며 미술관을 운영하며 간혹은 복장 터지는 일이 있어도 예의 사람 좋은, 허허로운 웃음을 허공에 날린다.

사실, 미술관 운영이 만만찮다. 일반 사립미술관과는 성격이 사뭇 다른데도 여타 사립미술관과 동격으로 치는 인식과 시선에 자신보다 앞서 지인들이 난리다. 의재 허백련 선생은 광주의 문화적 자산이고 의재미술관은 다른 지역에서 가져가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소중한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방치해놓는지 모르겠다고. 그런 말에도 대꾸 없이 그냥 허허롭게 웃는다.

그런 그를 두고 중국의 미술평론가 우홍량은 이렇게 말한다. “허달재는 내가 만나본 중에 가장 침착한 사람이다. 이 ‘침착함’은 술을 마시거나 차를 마실 때, 사람을 대하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그가 술이나 차를 마실 때 보면 겉으로는 구별할 수 없으나 태도가 평화롭고 끝을 알 수가 없다. 그가 일할 때 항상 띠고 있는 상냥한 표정이나 이따금씩 들리는 가볍지만 두터운 웃음소리에서 어떤 일이 닥쳐도 급할 필요가 없음을 느낀다. 그의 세계에선 마치 모든 것이 일정한 속도로 평온하게 앞으로 나아가며 어떤 일일지라도 모두 술 마시며 차를 즐기는 가운데 미소로써 완성되는 듯하다”

무엇을 그리든 그 사람의 마음이 담기지요

무엇을 그리든 마음을 담게 마련이라는 평소의 그의 지론에 어긋나지 않게 그는 전통 회화의 틀 속에서 현대적으로 형태를 전환하는 즉, 전통과 변화의 변주곡을 맑은 즐거움으로 해치운다. 그런 마음가짐은 이번 ‘변화란’ 전시회 뿐 아니라 그가 붓을 잡는 날까지 계속해서 우리를 즐겁게 할 터이다.

대동문화72호 [2012 9.10월호]

김영순 광주문화재단 홍보교류팀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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