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에 호남 전통문화예술 진흥원 설립 기대한다

본관 홍익의 집

앨빈 토플러는 인류가 최초로 농경 기술을 발견한 제1의 물결을 지나, 산업 혁명의 기술 혁신을 이룩한 제2의 물결을 경험하고, 고도의 과학기술을 맞이한 제3의 물결 시대를 살면서 이제 가족 관계의 붕괴나 가치관의 분열 등 미증유의 대변혁을 겪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한 번도 겪지 못한 미증유의 변혁이 증가되는 제4의 물결 시대에는 정치·경제·사회 구조와 같은 심층 기반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므로 이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신세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제4의 물결을 맞이하며 요구된다는 새로운 사고란 무엇일까? 그는 ‘인류가 제3의 물결에 대해 올바른 자세를 가진다면 새로운 정신세계를 구축하여 제4의 물결 시대를 잘 맞이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너무 평범한 답으로 들린다.

21세기 새로운 정신세계 구축이 필요하다

새로운 정신세계가 뭔지 해답을 찾기 위해 다른 접근을 해보자. 과학 기술과 정신 문화의 관계에 대해 미국의 사회학자 W.F.오그번은 저서인 <사회변동론>에서 ‘문화 지체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문화지체(Cultural Lag)란 ‘한 사회의 문화에는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데, 물질적인 영역(과학 기술)의 변화가 훨씬 빨라서 비물질적 영역인 정치․경제․종교․윤리․행동양식 등 제도와 가치관이 따라가지 못함으로 인해 생기는 사회적 부조화 현상’이다. 급속하게 발전하는 기술과 그에 부응하는 문화 간의 격차는 그 속도 차이만큼 과도기적인 혼란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술 발전에 따라 교통량은 늘지만 그에 따른 교통 질서나 문화는 따라가지 못하고, 에너지 소비량은 늘지만 환경이나 소비 문화는 낮은 수준이거나, 인터넷 환경은 발전하는데 익명성을 무기로 삼아 저급한 욕설과 사이버 테러가 만연하는 현상들을 말한다.

현대 사회가 전통 사회보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도 문화 지체에 대한 처방이 미약한 데서 기인한다. 과학기술 문명은 속성상 더욱 빨라질 것이니 문제는 속도와 방향을 제어하고 조응시킬 문화 영역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문화’는 영어로 culture인데, 원래 ‘농사’ 또는 ‘육체와 정신의 돌봄’이란 뜻이다. 농작물을 경작하듯 자기 정신도 잘 돌보는 것이 ‘문화’라는 말이다. 제 1의 물결인 농사의 시작으로 정착 생활을 이루면서 농사 원리처럼 정신을 돌본다는 서양식 개념이나, 농업 탄생과 함께 글(文)이 만들어지면서 정신적․예술적 표현력이 훨씬 풍부해지는 과정을, 정신의 돌봄이 글(文)을 매개로 한 진화 과정으로 보아 문화(文化)라고 표현한 동양식 개념 규정이 비슷하다.

전통문화는 우리의 DNA이자 정신의 씨

문화를 통해 급변하는 기술 문명의 속도와 방향을 제어하여 인류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전통문화는 이러한 문화 활성화에 중요한 열쇠다. 흔히들 풍성한 현대문화가 고루한 전통문화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문화의 풍성함은 전통문화의 수많은 반복경험을 통해 현대인들의 DNA로 녹아든 속에서 발현된 것이다. 우리의 뇌 구조는 경험되지 않은 어떠한 것도 조합되어지지 않기에, 실제로 창의력도 직간접의 경험 속에서 발현된다.

따라서 전통문화는 우리의 DNA이다. 문화를 농사로 보면 종자인 셈이니 끊임없는 진화 과정을 거친다. 시대변화 속에서 지키고 계승할 가치가 있는 것만이 전통문화가 된다. 그러나 이런 정신적 종자도 잘 돌보지 못하면 멸종한다. 가치 경쟁력이 있어도 주인이 시원찮으면 도둑맞고 팔아먹고 썩어버린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전통가치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왔고 몇 차례의 국난과 어려운 환경에도 잘 지켜왔다. 근래 들어 우리 전통문화를 잘 보존과 계승시켜온 기관으로 눈에 띄는 두 곳이 있다. 한국국학진흥원과 한국의 집이다.

경북 안동에 위치한 국학진흥원은 국학 자료의 보존과 연구 보급을 위해 설립됐다. 국학은 한국학을 지칭하나 좁게는 전통적인 한국학을 말하는데, 국학진흥원은 전통 한국학 중에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국학 자료를 수집․보존․연구하고 있다.

예로부터 경북 지역은 유교 문화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지역으로, 특히 안동이 있는 북부권은 퇴계학의 본산으로 기호학을 이끌었던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 유학을 양분했던 영남학파의 근거지다. 그래서 이 지역은 유교 흔적이 가장 많이 보존되어있는데 대부분 고택이나 문중, 서원에 흩어져 있고 그 보존이 개인에 맡겨져 있어 도난 및 훼손 위기에 처한 경우가 많았다.

10만장의 목판, 유교 문화의 아카이브

국학진흥원은 이렇게 멸실 위기에 있는 유학 자료들을 수집․보존코자 2001년 본관을 개관하였다. 이후 현재까지 십여 년 동안 모두 33만여 점을 웃도는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수집하는 동안 그 자료들을 분류 전시하기 위하여 유교문화 박물관을 지었고, 분량과 습도 등으로 보관이 어려운 유교 목판을 보관할 장판각을 지었는데, 2020년까지 10만 장의 목판 수집 계획을 갖고 있다.

 자료 수집은 구입이 아닌 기탁으로, 원소장자의 소유권은 인정하고 자료만 기탁 받아 보존 처리해 보관한다. 보존․보관에 따른 비용도 받지 않는 대신 학술적인 사용권을 보장 받아 유교 연구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기탁 자료 중에는 <징비록>(국보 제132호)을 비롯해 1,740점의 문화재가 있다. 자료들은 박물관에 전시하고 미공개 자료는 기획전․특별전으로 순환 공개한다.

수집 자료는 보존 처리를 거쳐 수장 시설에 보관하며 전산화 작업을 한다. 자료의 영구 보존과 자유로운 활용을 위해서는 전산화가 필수적이다. 전산화 결과 문집 DB는 1,328종 3,503책, 서원과 명문가 소장 고문서는 52,483건이며, 홈페이지(ugyo.net)에서 보여준다.

전산화를 토대로 완성형과 소스형 두 가지의 디지털 콘텐츠로 가공․보급한다. 소스형은 소장 일기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 소스를 개발하는 방식인데, 선현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작가와 PD 등 현장 전문가들의 관심이 높다.

학술 연구 분야에서는 학술 대회와 학술 교류, 출판 사업 등을 벌인다. 학술대회의 성과는 간행물인 「국학 연구」를 통해 알리고 있다. 학술 교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성균관대, 중국 산동성 공자연구원, 미국 하와이대 한국학 연구소 등 국내외 기관들과 활발히 벌이고 있다. 출판 사업은 소장 자료를 영인하거나, 금석문, 유학사상 대계, 일반인을 위한 교양 총서 등을 간행하고 있다.

전통문화 보급을 위해 전문가와 일반인, 유아 대상으로 연수 교육도 한다. 유아 대상 인성 교육은 일명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라 부르는데 일정 소양을 갖춘 할머니를 선발하여 거주지 유아들에게 전통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업이다.

전국적으로 105명이 활동하고 있으며 300명이 이수 중이며, 내년에 600명을 양성할 예정이다. 2013년부터 1천 명의 이야기 할머니들이 3천 개소의 유치원에서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인들의 경우 전통 문화 강의와 현장을 답사하는 내용으로 최근 3년 간 12,300여 명이 다녀갔다. 국학진흥원이 10년여의 일천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해온 성과는 만만치 않다.

서울 전통문화 홍보 문화의 전당, 한국의 집

‘한국의 집’은 전통문화를 홍보하기 위한 문화 공간이다.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이곳은 원래 조선 세종 때 집현전 학자였던 박팽년의 사저였다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관저로 쓰이면서 일본식 건축 양식이 섞이자, 문화재청에서 대목수 신응수로 하여금 1978년 새로이 짓게 했다.

공간은 사랑채와 안채로 꾸며진 해린관, 툇마루 달린 녹음정, 누각형의 청우정, 팔작지붕의 문향루 등 4개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전통 한옥의 멋을 간직한 공간에서 전통의 음식․공연․혼례․문화 상품을 판매하고 체험도 한다.

한국의 집에서 처음 접할 체험은 왕가의 맛을 되살린 궁중 음식이다. 삼국 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궁중 음식은 <조선왕조실록>과 <의궤>(진찬․진연) 등 문헌에 조리법과 기구, 상차림, 식사 의례, 식재료 등이 기록되어 있어, 이를 토대로 음식을 조리하고 있다.

모든 궁중음식 여기서 맛보세요

한정식은 대장금 정식 같은 고급 정식뿐 아니라 점심 특선, 50여 가지 뷔페식으로도 다양하게 제공되는데, 혼례 피로연이나 칠순, 회갑연, 상견례 등 특별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특급 호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메뉴와 분위기를 제공한다. 인공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으며 젓갈류는 철마다 현지에서 구매하여 재현시키는 등 제대로 살린 옛맛을 옛집에서 맛볼 수 있다.

30년 넘게 꾸준히 올려진 전통 공연은 쾌적한 전통예술극장(156석)에서 부채춤, 사물놀이, 장구춤, 태평무, 시나위, 타악퍼포먼스 등 다양하게 상시관람할 수 있다. 이곳의 목적이 전통문화의 보급․홍보이기에 공연관람 시 한․영․중․일 4개 국어로 설명을 들을 수 있는데, 공연팀은 국내 정상급이며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의 원형 보존 공연도 볼 수 있다.

체험 프로그램으로는 전통의 음식․무예․예절 등을 상설 운영하고 있다. 음식 체험으로 김치와 불고기를 직접 만들고 맛보며 가져갈 수 있다. 전통 혼례는 주자의 가례를 조선 숙종 때 좀더 간편하게 대중화시킨 <사례편람>에 근거하여 그대로 재현하여 실시하고 있다.

전통공예 전승을 위해서는 중요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들을 중심으로 현대 생활에 맞는 문화 상품을 개발하고 발전시키고 있다. 상품으로는 도자기, 나전칠기, 화각․한지․섬유․옻칠목공․금속․가죽 공예품 등이 있는데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의 작품을 합리적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국학연구원과 한국의 집을 보며, 다시금 우리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생각해본다. 현대 사회에서 오는 수많은 갈등의 근원으로 지목되는 문화 지체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토플러가 제4의 물결에 대비하라는 새로운 사고도 사실은, 우리의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과 같은 말이니 옛것을 본받아 새 것을 창조하는 것이 우리의 대응 전략이 되겠다. 우리의 문화 양식과 정신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하자면 전통문화에 대한 보존과 계승이 중요하다.

전통문화 꽃피운 호남에 보존 활용 기관 없다

전통문화 중에서도 예술 분야는 그 문화적 저변과 다양성을 확장시키는 근간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전통문화의 예술 세계를 꽃피우고 씨를 퍼뜨려왔던 호남 지역에 전통 문화예술을 수집하고 보존하며 활용할 기지가 없다.

호남 지역은 바다 접근성과 평야지대에서 오는 풍부한 생산력과 교통 편리에 기반하여 고대부터 독자적인 문화 양식을 세우고 계승시켜왔다. 호남의 입지는 물질적 풍요만큼이나 수많은 침탈을 당해야 했고, 그래서 개방성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피해 의식에 의한 독자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역사성을 보여왔다.

탁 트여 숨길 수 없는 개방성은 옳고 그른 분별에 의해 공동체를 유지하는 방식, 즉 합리성에 기초한 정의를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시켰고 이것은 오늘날까지 삼성 삼평이라는 항일 정신으로 발현되어 왔다고 보인다.

풍요와 빈곤이라는 조건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역사 지리적 환경에서 예술은 자연스럽게 싹트고 퍼져나간다. 아름다움의 탄생은 그 대가만큼 고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주 벌판을 물들인 붉은 황토땅은 그 비옥함만큼이나 헐벗음을 주고 이것은 예술적인 수용으로 승화되지 않으면 안됐다. 호남은 고대부터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다양한 예술과 종교로 승화 계승시켜왔다. 서편제와 동편제로 대변되는 판소리가 그렇고 남종화, 고려청자, 시가문학, 불교의 적극 수용과 민족 종교인 원불교․천도교․증산교 등이 그러하다.

남도 전통문화, 전통문화 진흥원에 모아져야

남도의 풍부한 문화유산이 제대로 모아지고 보존․계승되어야 한다. 문화중심도시 광주에 아시아문화전당이 2014년에 문을 연다고 한다. 52개국 아시아 문화들이 서로 소통하며 확산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교량 역할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문화에 대한 수집과 보존이다.

남도에 기반한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새로운 문명 조류에 밀려 사장되려는 지금, 과거 선조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그것을 잘 보존하고 계승시켜야 한다. 대전에도 아태 무형유산 센터가 들어섰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무형유산을 보호하는 일을 하는데 역시 취지가 좋다. 하지만 우리 전통문화의 보존이 또한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지구 공동체에서 너나를 따져선 안 되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살리는 것은 우선 각자의 지역에서 보존 활동이 1차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 전통문화의 예술적 면면이 살아 숨쉬는 남도에 남도 전통문화예술 진흥원이 들어서길 기대한다. 문화의 역할은 즉각적이지 않지만 근본적이기에, 우리 문화의 DNA를 풍요롭고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남도 전통 문화예술의 보존과 활용에서 출발되어야 한다. 문화중심도시 광주에 남도의 풍요로운 전통문화 예술을 수집하고 보존하며 연구하면서 그 멋과 맛을 확산시킬 그런 기관이 들어서길 기대해본다.

대동문화 68호 [2012년 1.2월호]

이동범 (주)컬처앤로드 문화유산활용연구소 대표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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