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집 목판각. 정교한 인쇄술의 하일라이트가 서각이다.

목판은 그 옛날에 하이테크 기술이었다. 인쇄술은 중국의 3대 발명품 중 하나고, 목판은 그 인쇄술의 출발이었으니, 첨단 하이테크 기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판은 그 시절 정보의 유통을 담당한 컴퓨터고 스마트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각’이란 이름으로 예술의 변방에 위치하며 작은 몸부림을 쳐대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옛날의 영광에 비하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서글픈 처지로 전락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니 반짝이는 영광을 물리친 지점이기에 더더욱 단단히 부여잡고 헐떡이며 각을 치는 이가 있다. 서각예술가 백남 라갑 씨가 그이다. 칼을 붙잡고 앉으면 네다섯 시간 족히 꼼짝 않고 나무판을 깎고 쪼고 오려낸다. 예술 훈향을 불어넣으면서. 누군가는 혹평할 수 있다. 그게 무슨 예술 행위냐고. 그냥 있는 글씨를 나무판 위에 옮겨놓는 거 아니냐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어찌 그렇게 치부될 일인가. 그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엔 덩그러니 대가의 행초서가 깃들고 민화가 자리하며 때론 풍속도도 새겨진다. 원작이 지닌 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그러안고서….

좋은 나무를 갖고 싶은 욕망을 끊지 못하다

그이를 만나러 가는 길,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시기적으로 코스모스라도 하늘거릴 법 하건만 도시의 골목엔 삭막함 속에서 그저 햇살만 그득히 고였다. 햇살은 그 빛만큼이나 내리쪼이는 강도도 드셌다. 아직 남은 가을 과실을 태양의 피로 물들게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따끔했다. 광주시 지산동 법원 길 언저리 작은 상가를 개조한 작업실엔 그가 미리 해놓은 작품들이 벽마다 걸려있었다. 어디 작품뿐이랴, 나무도 여기저기 켜켜이 쌓여있다. 나무는 작업실에만 쌓여있는 게 아니다. 자택의 단독주택 마당 이곳저곳에도 널브러져 있다.

“최근 들어 좋은 나무를 취급하는 목재상엘 가지 못해요”

왜냐고 묻는 필자에게 당연한 걸 궁금해 한다며 약간 퉁박을 주며 허허롭게 웃는다. 좋은 재목을 보면 빚을 내서라도 들여놓고 싶어서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무조건 들여놓고 보는 성질머리 때문에 그들에게 가는 발길을 아예 끊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무섭다는 말을 덧붙인다. 서각 연구가로서 좋은 나무를 갖고 싶은 욕망, 그걸 끊어내길 힘들단다. 서각을 하면서 좋은 나무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보아버렸다.

미리 사놓아도 되지 않느냐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더니 빚 자리만 남고 결국 월급으로 갚기에 힘들다며 씁쓰레 한다. 아니, 그건 또 뭔 말씀일까. 작품을 하면 곧바로 환금시킬 수 있을 거란 계산은 일반인의 생각이고, 서각이 제값 받고 팔기가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 서각에 대한 인식이 그리 높지 않은 것이 원인이라고 툴툴댄다.

국중제일선종대찰 영암 도갑사 일주문 현판

생명력과 약동감을 나무 위에 새기다

아,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 답은 간단하다. 그럭저럭 40년 남짓 하다 보니 서각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게 가슴 저 안에서 우러나와서다. 한번 자리 잡은 책임감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고 옭아맨다. 아니 슬슬 재미를 붙이게 됐다. 만만치 않다, 고단하다고 뇌까리면서도 정작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아니, 그는 즐거워한다. 아니, 서각에 빠져 허우적댄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옛 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 그렇게 서각에 미쳤기에 그는 오늘에 이르러 서각의 일가를 이뤄 자신의 작업에 매진할 뿐 아니라 후진 양성의 기쁨도 누린다.

서각 예술은 문자를 소재로 나무나 돌 등 기타 재료에 양각 또는 음각으로 새기는 예술을 말한다. 서각 행위는 격렬한 육체의 촉감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박력 있는 조형미를 전달, 현대인의 미감을 채워주는 입체 예술이다. 서예가 붓으로 평면의 종이 위에 표현되는 것이라면 서각 예술은 칼 끌망치 등의 공구를 이용해 이를 한 차원 높여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색채를 가미하는 공예다. 종이 위에 남기는 서예를 입체적인 칼 맛으로 새겨 깊이가 있고 높이가 형성돼 생명력과 약동감을 발휘한다. 선조들의 얼과 혼이 서린 전통문화예술로서의 가치에다 현대의 감각이 보태어지고 기법이 새로워져 예술 영역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

쓰기 행위와 새기는 행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붓 쓰기를 칼 쓰듯 하고 칼 쓰기를 붓 쓰듯 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서예의 영역을 지필묵연의 영역에 가두어 두는 것은 잘된 것이 아니다. 인류사를 들여다보면 각자(刻字) 문화가 모필보다 더 앞서 있다. 각자 문화의 선구는 물론 중국이다. 은대의 갑골문, 주대의 각종 금문, 진대 이후의 석각 등 당대 이후 종이 사용이 일반화되기 이전에 이미 ‘문자의 새김’이 모필에 앞서 일반화돼 있었다. 넓은 의미의 서(書)의 세계를 종이 위에 쓰는 모필에 그쳐선 안 된다. 때문에 서각예술의 세계로 확대하고 발전시켜 하는 것이 오늘 서각 예술가들이 해야 할 미션이다.

먹을 갈고 있노라면 붓 끝에 혼이 맺혔다

처음부터 칼을 잡지 않았다. 붓을 잡고 글씨를 썼다. 서예 연구를 한 것이다. 그런 그가 칼을 잡은 것은 붓맛보다 칼맛이 좋아서가 절대 아니다. 그냥 호기심이었다. 붓으로 쓴 글씨를 칼로 깎고 쪼이면 어떻게 될까 하는 호기심의 발동이 붓을 내던지고 칼을 들게 했다. 아니다, 요즘도 간간이 붓을 들긴 한다. 날마다 칼을 들고 간혹 붓을 잡는다. 물론 직접적인 계기가 있었다.

붓을 든 것은 대학 3학년 때의 일이다. 조선대 기계공학과를 다니던 그가 서예 연구원을 찾은 것은 순전히 교직에 계셨던 선친의 권유에 의해서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송곡 안규동 선생이다. 송곡 선생은 호남 서단의 큰 줄기를 형성하는 대가로 후진 양성에도 힘써 내로라하는 서예가들을 배출해 한국 서예계의 토대를 튼실히 했다.

학정 이돈흥, 용곡 조기동, 송파 이규형, 삼헌 맹천호, 운암 조용민, 녹양 박경래, 금초 정광주 등이 동문수학했던 선후배들이다. 몇 시간이고 먹을 갈고 있노라면 마음이 착 가라앉으며 절로 붓끝에 혼이 맺혔다. 그렇게 글씨를 썼다. 다신 돌아갈 수 없는 옛 시절, 그는 그렇게 붓을 들어 꼭꼭 눌러 글씨를 쓰며 정신 세계를 드넓혔다. 영원히 거기에 머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놈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것저것 기웃거리고 직접 해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 기질 때문에 어느 때 우연히 서각을 접하게 됐다.

모필의 흐름을 몸으로 무르익힌 40년 세월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에 부임한 백남은 74년 강원도 강릉으로 발령이 났다. 강릉농고에 근무하게 된 그는 스승인 송곡 선생의 인도를 받아 강릉에 머물고 계시던 벽진 최옥인 선생 문하에서 계속 서예 공부를 하게 된다. 이때 처음 각을 보게 되고 예의 호기심에 힘입어 칼 쓰는 법을 배우고 공예사를 기웃거리다 못해 전국 각지의 서각 전문가들을 수소문해 찾아다닌다.

그렇게 3~4년의 세월을 보내고 78년 무렵 철재 오옥진 선생을 만난다. 우연히 인사동 한 화랑에 갔다가 선생의 작품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당장에 수소문해 선생의 문하에 들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배웠다. 서각에 미쳐버렸다. 한 달에 서너 번씩 서울을 오르내렸다. 마치 공고에 근무해서 수업 시간 외의 시간을 공구실에서 오롯이 작업에 매달렸다. 그렇게 1주일 내내 작업한 것을 가지고 선생님께 보이고 또 다른 가르침을 전수 받았다. 몸은 힘들었지만 배움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모필의 흐름을 이미 몸으로 파악하고 있어서 칼로 새기는 각의 필체 표현이 훨씬 세밀하고 정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모필을 잡았던 서각 연구가의 커다란 장점이다. 그로 인해 모필을 접하지 않은 서각 연구가들이 새기는 서각과 비교해 훨씬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서각 예술을 빚어낼 수 있었다. 또 모필로 감상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것을 각으로 옮길 땐 약간 아쉬울 때가 있다. 어느 선에서 수정되면 훨씬 살아날 수 있다는 감각이 그것이다. 그때 백남은 주저 않고 서예가와 상의해서 보정을 거친다. 예전에 스승인 송곡 선생의 작품을 각으로 옮길 때 보정의 위치를 짚어냈는데 스승과 일치해 그 때부터 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서각을 보면 살아 꿈틀거리는 힘이 느껴지는 것은 모필을 정확이 알고 짚어내는 경험치가 있어서다.

스승인 철재 오옥진 선생은 96년 국가지정 무형문화재가 되셨다. 그로부터 1년 후 백남은 이수자 5호로 지정된다. 성실히 서각 예술에 임하고 날로 실력이 부쩍부쩍 올라가는 제자의 역량을 스승이 인정해서이다.

죽는 날까지 칼을 잡고 서각에 품격을 담아

철재 선생은 단순히 서각 예술에 뛰어난 것만이 아니다. 서각 예술에 필요한 도구의 발명에까지 큰 공로를 남기셨다. 예전엔 서각 예술을 할 적에 한쪽 날의 칼을 썼었다. 그에 반해 요즘엔 양날의 칼을 사용한다. 양날의 칼은 회전이 가능해 칼의 쓰임새가 훨씬 높아진다. 돌려가며 쓸 수 있어서다. 이 양날의 칼을 스승인 철재선생이 만들어 보급시켰다. 그처럼 훌륭한 스승의 뒤를 밟아가는 게 백남이 소망하는 바다.

3년 전 교직을 정년퇴직한 백남은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서각 예술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 저변을 확대해야 하고 그에 필요한 것이 후진 양성이라고 여기고 그는 오래 전부터 서각 예술 가르치는 데 심혈을 쏟았다. 수업료는 없다. 무료다. 또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제자들이 설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각종 미술대전에 서각의 장르를 집어넣어 초대작가만 해서 수십 명을 배출시켰다.

죽는 날까지, 칼을 잡고 각을 새기겠다는 백남은 서각에 인격이 묻어나 품격이 세워진다는 사실을 믿으며 날마다 칼을 잡고 나무엔 각을 새기고 마음엔 정갈함을 새긴다.

대동문화 73호 [2012 11.12월호]

김영순 광주문화재단 홍보교류팀장  webmaster@chkorea.news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