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장문이란 게 있다. 분청사기의 유명한 기법이다. 그릇 표면을 백토 물에 담갔다가 건져내 표면을 하얗게 만드는 분청기법이다. 분청사기는 아주 다양한 기법을 통해 여러 느낌을 만들 수 있다.

그릇은 단순하지 않다. 그 안에 기질이 담긴다. 청자는 귀족적인 분위기를 뿜어내고, 조선 백자는 양반들의 눈빛 같은 기질을 담는다. 분청사기는 다르다. 서민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분청사기의 미학이다.

명작을 향한 40년 집념과 외길

전남 무안 몽탄 지역은 조선시대 때부터 유명한 도요지였다. 땅이 그릇에 이롭다. 몽탄은 영산강과 서해를 끼고 있다. 그릇을 만들어 곧바로 중국과 교역을 할 수 있었다. 몽탄 곳곳에는 청자의 상감기법을 이어받은 사기장(도공)들의 가마터가 도열해 있었다. 분청가마터도 많아 완벽한 형태의 가마터와 도자기 파편들이 발견됐다.

300년 동안 분청사기와 옹기의 맥을 이어온 땅, 그래서였다. 도예가 정철수는 몽탄을 떠날 수 없었다. 해방 이후만 해도 몽탄의 석산포 나루에는 하루에도 수십 척의 거룻배가 들어와 옹기를 실어나갔다. 지금은 옹기장이도 거룻배도 세월의 무심함에 실려 사라졌다.

별거 아니지만 앞으로 내가 살아 나아가야 할 길이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무심의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가 명맥을 잇고 있는 ‘몽평요’ 굴뚝에서는 아직까지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모락모락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도예가 정철수, 그가 오랫동안 흙을 만지며 살아가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서민적 깊이를 지닌 분청사기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명작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 꿈을 품고 몽탄에 내려와 40년 동안 그는 한길을 걸었다.

“무안에 오기 전에는 서울에서 태어나 스물일곱까지 살았습니다. 외신의 통역을 맡아 1주일동안 취재를 하게 되었는데요, 그때 도예를 처음 접하게 되었어요. 일본 기자들과 함께 도예가가 만든 작품 과정을 모두 보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기로 마음먹었죠.”

꿈을 품은 순간 그의 인생은 궤도를 완전하게 수정했다. 그 자신도 믿기지 않았다. 살아가면서 그는 자신의 선택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음을 느낀다. 아마도 전생의 인연이 그를 몽탄으로 잡아끌었을 것이다.

“그 시절 차라리 돈을 벌었다면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을 겁니다. 양손 중 하나의 어느 것을 놓아야 했습니다.” 인생의 이치가 그렇다. 둘 다 잡을 수는 없다. 하나를 얻었다면 하나는 놓아야 한다. 그는 남은 일생을 ‘쟁이’로 살아가기 위해 인생 방향을 돌렸다. 어렵고 힘든 길이었다. 그 길 행복했다. 그 길 위에서 늘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다.

“삶의 지수로 보면 ‘쟁이’의 길이 최고라는 거죠. 살아가는 과정 모두가 이야기이기 때문에 최고입니다. 다 갖춰진 이야기는 재미가 없죠. 너무 뻔한 것이라 재미가 없습니다. 약간의 아쉬움과 아련함, 그런 게 있기 때문에 이 길로 가는 것 아니겠어요?”

1975년 그는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바쁜 도시에서 돈을 벌면서 20년 수명을 단축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질서했던 생활을 정리하고 싶었다. 무안 몽탄으로 내려왔다. 전체 마을이 옹기 만드는 일로 먹고 살았던 곳이다.

“뭔가 내 인생의 결단을 내려야했습니다. 둘 중 하나를 잡아야했고 저는 결국 이 길을 선택했어요. 지금은 어렵더라도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도 없고 미련도 없습니다. 단하나 집사람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자신과 대화를 하다 보니 욕심이 많았구나 생각이 들었다. 작품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찌 보면 거울이 작품을 찾아내기도 하고 답을 주기도 한다. 그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서 말이다.

새롭게 연 전통 가마 분청사기 1세대

전남에 그릇을 만드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전통 가마로 분청사기를 만든 사람은 그가 최초였다. 1975년, 그는 분청사기의 새로운 세대를 열었다. 40년 동안 도자기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없음이 그는 아쉬웠다. 그는 분청사기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물레도 다시 배웠다.

“오래전 법정 스님이 이곳에 들려서 저희 부부와 무안 연꽃방죽을 같이 산책한 기억이 납니다. 몇 줄 되지 않지만 그 날 산책한 내용을 글로 쓰셨습니다. 책이 출판되었는데 사람들이 이곳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것을 읽어본 독자들이 연꽃방죽 문의도 많이 하시구요.”

소식을 들은 법정 스님은 그에게 제안을 했다. 무안 지역의 중요한 명소가 되게 만들어 보라고 말이다. 처음 도예를 시작했던 그날의 초심을 생각하면 못할 것이 없었다. 방법을 찾았고, 더욱 분청사기에 매진했다. 이제 그도 나이 들었다. 뒤를 받쳐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후사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는 요즘 많은 것을 비워내고 있다.

“꿈을 갖고 집과 작업실을 넓혔어요. 지금은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이곳 인테리어도 직접 제 손으로 하나하나 만들었죠.”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골격 빼고 목공일은 손수 그가 해냈다. 그래서 정이 가기도 하지만 역으로 욕심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이제는 30평 정도 되는 공방에서 방 하나 놓고 그렇게 저렇게 흙 만지면서 살수만 있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40년 만에 다시 시작된 그의 꿈은 그렇게 소박하다.

“제 나이 64세입니다. 이 나이에 인생을 다시 설계할 수 있는 계기를 찾은 것에 만족합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합니다.” 육체적인 노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건강한 편이다. 한 20년은 희망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평생 만졌던 흙은 그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줬다.

몽탄면, 몽강리, 몽평요, 몽향 정철수. 합해 보니 ‘꿈몽’ 글자가 4개나 들어 있다. 그의 분청 작품들을 보면 무언가 보인다. 그릇 속에 꿈을 간직하고 살고 있는 그의 마음과 숨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꿈결 같은 몽탄의 황토빛 서정과 남도의 정도 진하게 묻어난다.

분청사기는 회색이나 회흑색의 태토 위에 백토로 분장한 분장기법으로 투박하고, 실용적인 서민의 미를 대표하는 그릇이다.

흙속에 무슨 마음이 있겠는가? 무심과의 대화

그의 집안으로 들어가면 후각을 자극하는 그윽한 차향기가 가득하다. 거실은 온통 도자기들로 가득 차 있다. 말차 다완도 가지런히 놓여 있다. 평범하면서도 따스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그릇이다. 그가 말차 다완 두 개를 내밀었다.

“6개월 전부터 유심과 무심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말 나를 흙속에 묻고 흙속에서 나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유심과 무심의 차이다. 아무 생각 없이 나온 무심 속에서 하는 작품이 흥미로웠다. 무심에서 나온 작품이 욕심나서 유심을 가지고 작업을 해봤더니 실패했다. 유심과 무심이 공존한 시간부터 그는 자신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느낌에 의해서 나온 작품이 좋은 작품입니다. 내가 스스로 한 것이지만 또 다시 같은 것을 못하는 작업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무심이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작은 소품이지만 그의 마음이 담겨있는 어느 작품보다 아낀다. 40년 동안 처음으로 나온 진실 된 작품이다. 그는 나이 들면 들수록 흙속에 무엇을 표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요런 작품이 몇 점만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루에 한두 점만 만들어도, 늘 흙하고 싸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들어내기보다는 아름답게 소소한 삶으로 숨어버리고 싶어요.”

비어내고 싶은 것이다. 그는 간절하게 그것을 원하고 있다. 그런 기다림 속에서 살아가고 계속 흙 속에 몰입한다. 기다림이 없다면 그가 거기 있을 이유도, 살아갈 이유도 없다.

대동문화 74호 [2013 1.2월호]

한경숙  -0811-@hanmail.net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