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ight 별이 빛나는 밤 50호

흩뿌려진 사각형들이 마치 눈송이 같다. 허공에 날려진 사각은 질주하는 듯 규칙 없이 부유한다. 그러다가 어느 대목에선가 어떤 흐름이 읽혀지기도 한다. 때론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며 나무가 있는 듯한 자연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그런가 하면 그 흐름의 형상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힘들게 우주적으로 다가든다.

작가 정송규 씨가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듯 그려낸 그림이다. 지난 90년대 중반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어머니의 조각보에서 착안해낸 질곡과 인내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고개 처박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려댔다. 그렇게 그리길 십 수 년. 질리고 싫증날 법도 하건만 다소의 변주를 곁들일 뿐 지속하고 있다. 원래 그 작품의 콘셉트인 인내를 민낯으로 보여주려는 듯이.

어머니의 조각보, 질곡과 인내의 세계 형상화

정송규 서양화가는 조각보를 한 땀 한 땀 이어가 인고의 세월을 안으로 새기면서 자신을 정화시켜온 한국 어머니의 따스한 숨결을 화면에 펼쳐내고 있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수은주가 영하를 한참이나 아래로 밑돌던 날 무등산 아래 자리 잡은 작업실을 찾았다. 선생이 수년 전 지어 내실 있게 운영하고 있는 무등현대미술관 2층이 작업실이다.

무등산이 넓은 창 안으로 들어와 앉은 작업실에서 선생은 붓질을 하다 말고 손을 맞이한다. 넉넉한 품과 웃음으로 추위를 몰고 간 손에게 따뜻함을 한없이 건네준다. 아, 이 다정함, 어디선가 낯익은 정경이다. 바로 우리네 어머니의 다정함과 따뜻함이다. 폭 안기고 싶게 따뜻한 이 분위기, 정말 좋다.

분명, 작가 탐방으로 왔건만 작품 못지않게 미술관이 더 크게 다가든다. 그도 그럴 것이 미술관이 워낙 큰 행보를 그것도 튼실한 행보를 해왔기에 그렇다. 사립미술관 운영이 쉽지 않다. 아니, 엄청 어렵다. 그래서 적잖은 사립미술관들이 개점휴업인 상태다. 하려고 해도 재원이 확보되질 않아서 손을 놓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혹독한 상황에서도 무등현대미술관은 팡팡 잘 돌아간다. 순전히 정 선생이 관장 노릇을 잘 하고 있는 덕택이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짜낸 보람이다.

1년이면 기획전을 적어도 네다섯 차례나 마련하고 미술 마니아들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벌이는 것마다 대체나 볼 만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라서 무등현대미술관이란 이름이 지역을 넘어 중앙에까지 제법 알려졌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 광주를 대표하는 간판 사립미술관으로서의 명성이 자자해진 것이다.

“무슨, 그렇게까지….” 하고 말끝을 흐리지만 저 안으로부터 당당함이 자연스레 차고 나온다. 어떻게 흐름들을 놓치지 않고, 또 좋은 기획전을 적절히 마련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교육과 포럼을 놓치지 않는다고 대꾸한다.

올해로 칠순, 배우는 기쁨이 아직 새록새록 하기에 중앙이건, 지역이건 빠질세라 다닌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기서 배우고 느낀 것들을 뜨끈뜨끈하게 잘 보관하고 익히고 숙성시켰다가 곧바로 기획전으로, 교육 프로그램으로 엮어낸다. 몸과 뇌의 부지런함이 미술관 활성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Delight-움트다

무등산 자락 무등현대미술관 알차게 운영

올해 했던 기획전만이라도 대충 일별해보자. 지역의 전업 작가들의 뒤에서 눈물 콧물 다 뺐을 화가들의 아내 이야기를 담아냈던 ‘내 여자전’ 젊은 작가들이 1년여 간 무등산을 여러 차례 답사하며 공부한 끝에 형상화해낸 ‘무등산전’ 현대미술의 재기발랄함의 현재형을 보여주고자 했던 ‘ING’전 등이 그것이다. 한결같이 의미 있는 발걸음이었다. ‘ING’전에선 이 지역에서는 감상하기 힘든 작가들을 초청해 선보임으로써 지역 미술 마니아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미술관이 해야 할 역할로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게 교육이다. 무등현대미술관은 이 부분 역시 신경을 쓰고 있다. 성촌 마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예술 서당 이야기’는 지역특성화문화예술교육사업(문광부) 중에서 탁월한 프로그램으로 주목받고 있다.

미술관 건립 이후 지속적으로 성촌 마을의 문화 자원을 프로그램으로 연결해 지속함으로써 발전, 진화돼온 프로그램이다. 2012년엔 전통문화관을 교육장소로 삼아 참가 어린이들에게 성촌 마을을 토대로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전통을 알아가고 이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게 하는 데까지 끌어올렸다.

또 있다. 무등산발전협의회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광주의 정신적 표상이라 할 무등산이 우뚝 서야 한다는 소신 아래 모임을 창설하고 뒤에서 지원하며 포럼 및 다양한 사업을 이끌어내고 있다. 광주박물관미술관협의회 회장직(2010~2011)을 수행하며 지역 미술관 문화 발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미술관 관계자 교육 워크숍에 신경 썼다. 중앙 단위에서 이뤄지는 교육에 참가하기 힘든 지역의 여건을 고려해 아예 교육 프로그램을 지역에서 개최해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또 사립미술관 운영 조례를 통과시켜 2012년부터 8천만 원을 지원받고 있다. 이를 5개관이 동일하게 1440만원씩 받아 애로 사항이 많은 미술관 운영에 보태고 있다.

이처럼 미술관 전시 기획에다 문화예술 교육으로 하루해가 짧기만 한 선생은 또 그림 그리는 일에도 소홀할 수 없다. 그의 주업은 화가이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는 일을 제치고 이 일 저 일에 휘둘려 살지만 누가 뭐래도 그림 그리는 게 본업이다.

덕분에 미술과 관련해서만 일인 삼역을 하고 있다. 미술관 기획 및 경영, 문화예술 교육, 그리고 화가로서의 작업 등이 얼키고설키며 바쁘게 돌아가는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엔가 광주시립미술관 황영성 관장이 무등현대미술관에 들렀다. 마치 전시 중이던 기획전을 한 바퀴 휘 둘러보더니,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지 않고 남의 그림 보여주며 사는 게 재미있냐며 놀리듯 말하던 게 의미심장하게 다가들었다.

그래, 내 그림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간혹 허탈할 때도 있지만 다시 곰곰 생각해보면 이게 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새삼 알게 되면 뿌듯해진다고…. 미술관 건물을 덩그러니 세워놓고 가동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문 닫아 놓을 수 없다. 그래서 동분서주해 전시회를 만들고 재원이 없으면 사비를 들여서라도 끝끝내 열고 만다. 그 불굴의 정신은 자신의 작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사랑 40호

점과 면이 펼쳐낸 우주적 모성의 세계

그의 그림을 중국 미술평론가 황두는 ‘예술가의 개성과 문화의 정체성의 결집’이라고 표현했다. 조각보라는 어머니 시대의 유물을 소재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여인네들의 생활 방편으로 만들어진 조각보로 출발하지만 이미 조각보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조각보의 정서를 통해 자신의 어머니를 뛰어넘어 조선 시대 여인네들의 숨결까지 연결하면서도 현대 미술로서의 형식과 의식을 담보해내고 있다. 한 뜸 한 뜸 작은 점을 찍어나가면서 거기에 머물지 않고 거대한 우주적 구성의 화폭으로 펼쳐놓는다.

단순한 면들의 직조가 이루는 웅장한 공간은 투명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는 초기에 정물, 인물화를 주로 그렸고 1997년 이후에 어머니의 삶을 주제로 한 연작에 매달렸다. 가족을 위해 애오라지 바쳤던 어머니들의 삶이 곧 예술이라는 생각에서 작업으로 연결시켰다.

매일 반복되던 어머니의 삶은 조그만 면의 조합으로 표현됐다. 단순한 면의 배열은 삶의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되듯 어린 시절의 기억과 현재의 삶을 한 땀 한 땀 새긴 조각보에 다름 아니다. 조각보가 다채로운 천 조각을 잇대어 만들어졌지만 현란하지 않고 차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것은 천이 아닌 물질성이 어느 정도 걸러지면서 푸근한 질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유화 안료가 지닌 기름기를 적절히 제거해냄으로써 도달한 기법도 크게 한 몫 하고 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통해 바래진 것 같은 소박한 정감이 잔잔하게 화면을 덮어간다. 인고의 세월을 안으로 새기면서 자신을 정화시켜온 한국 여인들의 따스한 숨결처럼 그렇게 입혀지고 있다.

무등현대미술관에선 ‘무등산전’이 열리고 있다. 젊은 작가들이 무등산에 대해 1년 간 답사하고 공부한 것을 토대로 자신만의 해석으로 무등산을 형상화하고 있는 기획전이다. 지난 5년여 간 열심히 한 덕택에 제법 관람객이 찾아온다.

이들에게 더 나은 미술관 문화를 선보이기 위해 그는 또 다른 계획을 세운다. 미술관 옆 부지를 사들였다. 그곳에 작업실 겸 문화상품 아트숍, 그리고 미술 교육장을 만들고 현재의 미술관 공간은 1, 2층 전시장으로 활용하고픈 희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게 언제쯤 될지….

부지는 어찌어찌 구입했으나 건축비는 엄두도 내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신경은 온통 미술관 운영과 내년 기획전, 그리고 문화예술 교육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어쩌면 그게 그가 작업하고 있는 조각보 정신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한 땀 한 땀 찍어나가는 조각보의 그림처럼 그는 세월의 한 켜 한 켜를 그렇게 살아내며 맘 먹은 바를 끝내 해치우고 말거다.

대동문화 74호 [2013 1.,2월호]

김영순 광주문화재단 홍보교류팀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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