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명품도시들은 하나같이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고 문화의 수요와 공급이 동시에 발생한다. 시민들은 생활은 문화고 문화는 밥이다. 아시아의 모든 문화를 집대성하여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은 미래의 밥상이다. 광주가 할 일이다.

일제시대 장기18은행 지점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하는 군산시

우리가 가진 5천년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비롯한 풍부한 문화자산과 국민의 창의적 역량이 가장 뛰어난 장점이라 본다. 문화가 가진 창조적 본성에 사회적·역사적 책무를 더하여 공동의 선을 도모한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문화적 유전자’다.

‘문화적 자산’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보통 남아있는 유형 자산(문화재)의 많고 적음을 헤아리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배태한 정신적 힘이다. 세계인이 공통적으로 이해할 만한 정체성, 정신성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지난 수 십 년간 개발과 지역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진 문화 파괴부터 반성해야 한다. 과거의 도시개발은 뜯어내고 새로 만들기에 급급했다. 대표적인 것이 새마을운동인데 단시일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고 하면서 참 귀중한 전통문화를 말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에 추진된 신도시 사업이나 주거환경 개선사업, 도시환경 정비사업, 재개발사업, 재건축사업 등은 당장의 경제성과 편리성에만 몰두함으로써 어느 지역, 어느 도시나 획일적인 콘크리트 건물만 만들어냈다. 문화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던 것이다.

우리 문화의 현주소

우리만의 독창적인 문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그 바탕에 양질의 서구문화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서구문화를 급속도로 받아들이는 fast follow가 되어왔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정부와 지자체들이 각종 개발사업에 있어 지역의 역사성, 장소성을 고려해야 하고, 원주민들의 삶, 인간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또 문화지원을 하면서 행정의 경직성과 문화예술의 유연성의 간극을 감안하여 소위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문화란 ‘아래로부터’ 시작되는 부드러운 힘에서 생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만이 갖는 선사시대 이래의 역사와 전통을 비롯하여 현존하는 유․무형의 모든 문화가 밥 먹고 살 수 있는 문화라 할 수 있다. 일례로 우리의 대중음악이 K-pop으로 불리며 외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고,

전주 한옥마을에는 매년 5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다. 대구는 옛 읍성 주변의 골목에 스며있는 이야기를 발굴해 5개 코스로 엮어내 도시재생에 성공했고, 인천과 군산은 일제시대 건물을, 완주의 삼례문화예술촌은 일제의 양곡창고를 리모델링하여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

우리의 가요, 민요, 역사, 전통, 문화재, 가옥, 옛 건물, 음식, 골목길 이야기 등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의 모든 것이 문화로서, 옛 것을 어떻게 보존하고,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어떻게 발전시키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밥 먹고 살 수 있는 문화가 될 수 있다 할 것이다.

일제의 쌀 수탈 양곡창고를 리모델링하여 문화시설이자 역사교육장으로 탈바꿈한 완주군 삼례문화예술촌

국민이 형성하고 있는 문화적 역량

우리의 문화적 역량을 이야기하려면 비교 대상으로서 외국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세계적인 명품도시들은 하나같이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고, 현재와 미래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거기에 문화의 수요와 공급이 동시에 발생한다. 문화도시, 축제도시로 이름난 지역의 시민들은 문화가 곧 생활이다. 문화예술 활동에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일상적이다.

대규모 문화시설은 마중물의 역할이지 결코 주인공이 아니다. 그런 문화시설과 연계한 지역별, 동네별 다양한 프로그램이 펄펄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게 핵심이다. 문화와 예술이 시민들의 일상적인 삶과 밀접하게 상호작용을 하고.

주민이 일방적인 소비자거나 방관자가 아니라 문화예술의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풍부한 문화자산을 가지고 있고 국민의 창의적 역량은 뛰어나지만, 그것을 담아내고 생산하는 문화적 역량은 아직 낮은 수준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문화와 경제의 상관관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경제가 존재의 문제라면 문화는 어떻게 존재하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문화는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삶의 질이다. 결국 문화와 경제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에 ‘산업의 문화화, 문화의 산업화’란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소득이 높아지면 그만큼 문화적 욕구가 커지게 되고, 자연스레 문화의 산업화와 산업의 문화화가 뒤따르게 된다. 문화예술을 통해 지역과 국가의 발전이 이뤄지는 것이고, CI(Corporate Identity)∙색채∙디자인 등 생활 속에 수준 높은 문화예술이 스며든다. 우리의 문화적 역량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다.

정부가 다양한 문화지원을 하고 있지만, 거의 하드웨어 중심이다. 그 운영은 대부분 지자체가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콘텐츠와 프로그램이 미약할 뿐만 아니라 담당 공무원들의 역량이나 문화적 마인드가 부족하고, 그나마 공무원들이 수시로 바뀌다보니 지속적인 관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구나 정부의 지원이 하드웨어 중심의 단발성에 그치다보니 운영․관리 예산이 없거나 부족하여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문화융성시대, 지역 균형발전의 원동력

지역간 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정부가 하드웨어 중심의 단발성 지원에 그칠 게 아니라 콘텐츠․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관리를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또한 정부나 지자체가 직접 문화판을 벌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지역예술가, 기획자의 능력을 키워주는 문화인력 양성이 필요하다.

또 행정이란 사회적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변화를 두려워하는 속성을 갖는 반면 문화란 창조성이 핵심인지라 기존의 틀에서 자꾸 벗어나려는 속성이 있다. 서로 속성이 달라 보통 행정과 문화는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십상이다.

따라서 문화행정은 이미 정해진 사회적 시스템을 끊임없이 벗어나고자 하는 ‘창조적 본성’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어느 국가, 어느 도시든 역사와 환경에 따른 정체성이 제각각이지만 광주는 이미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맞게 도시의 정체성을 키워야 한다. 지난 2011년에 세계적인 창조도시 전문가인 찰스 랜드리와 대담을 하면서 문화도시 광주의 방향을 두고 진지한 논의를 했는데, 광주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 공감을 했다.

즉, 문화전당과 주변지역이 서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동시에 작동되도록 활성화시키고, 시민들이 생산하면서 소비할 수 있도록 문화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이루게 해야 한다. ‘Meeting of Minds’(정신의 모임)이나 아이디어 페스티벌과 같은 ‘정신성’을 집중하는 도시 특성을 발굴해가야 한다. 초기에는 ‘에든버러’처럼 작은 규모로 출발하되 점차 국제적 규모로 확대해가는 실행방식을 취해야 하며, 문화전당의 프로그램을 대인시장, 남광주시장, 조선대 등 주변 자원과 연결하여 ‘문어발’식으로 확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 정부와 지자체가 상호 협력을 통하여 시스템을 통제해야 하고, ‘파리’하면 ‘패션의 도시’하듯이 ‘광주’하면 떠오르는 광주만의 독자적 브랜드 상품이나 프로그램과 같은 독특한 창의적 아이덴티티를 개발하여 전 세계에 확산시켜야 한다. 나아가서 세계인에게 주목받을 국제적 문화 관련 회의를 개발하고 개최하는 등의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이병훈 아시아도시재생연구원 이사장

* 이병훈 아시아도시재생연구원 이사장은 광주서중일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법대, 전남대 행정학 석사다.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했으며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 전남 광양군수(37세), 전라남도 기획관리실장을 지냈다. 문화부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장(1급)을 역임하며 지역문화를 선도했다.

[대동문화 92호. 2016년 1,2월호]

이병훈 아시아도시재생연구원 이사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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