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살고 있는 마을은 ‘큰 마을(大村)’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광주광역시 남구에 있는 대촌동이다. 40여 자연마을들이 모여 있는 대촌동에서도 칠석마을은 한때 주민이 1,200여 명에 이른 적이 있는 큰 마을 중에서도 큰 마을이다. ‘고싸움놀이’로 유명한 칠석마을은 영산강 지류인 대촌천을 근거로 청동기 시대부터 주민이 터를 잡고 농사를 짓고 살아온 역사 깊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지금도 대종사라 통칭되는 ‘동약(洞約)’과 ‘고싸움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대촌에서 마을기업 ‘남동풍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필자는 우리나라 전통의 풍부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칠석마을 공동체 전통과 고싸움놀이 행사에서 최근에 발견했다.

공동체 문화의 원형, 광주 남구 칠석마을

칠석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정월초가 되면 먼저 가족 공동체를 세우는 의식들을 행한다. 조상님들께 차례를 올린 다음, 일가친척과 동네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세배 드리고, 타지에 살고 있는 친척들에게 세배를 가기도 하고 원근에 있는 조상들의 묘를 찾아 성묘한다.

이런 의례가 끝나면 어른들은 윷놀이, 화투놀이, 투전놀이 등으로 세초(歲初)를 보내고, 아이들은 연날리기, 팽이치기, 못치기 등을 하면서 즐긴다. 그리고 나서 정월 10일 경이 되면 고싸움 준비를 위한 마을일이 시작된다.

정월 대보름 전야인 14일 밤은 가정에서 대보름제를 모시고 마을에서는 당제를 모신다. 집집마다 황토를 깔아 부정을 막고 마을 당산나무에 금줄을 치고 자정이 넘으면 당신에게 제를 올린다. 16일은 ‘삼일굿’이라 하여 온 마을 집집마다 마당밟기 굿을 친다. 이 같은 마당밟기는 집안의 기운을 새롭게 할뿐만 아니라 집 마당을 단단하게 해줌으로써 한 해 농사를 위한 꼭 필요한 물리적 기반을 다져준다.

그리고 17일~18일경에 고싸움 준비에 들어간다. 상촌과 하촌 마을 유지들이 모여 행사 날짜와 제반 일을 협의한다. 합의가 이뤄지면 준비위원과 ‘줄패장’을 뽑는다. 여기서 뽑힌 준비위원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고를 만드는데 필요한 짚을 걷고 산에 올라가 나무와 대나무를 베어오는 등 준비를 한다. 고싸움은 먼저 횃불을 켜든 ‘횃불잡이’가 앞에 서서 인도하며 농기와 영기를 든 기수들이 따르고 농악대가 그 뒤를 따른다. 상대편 고를 땅에 눌러 승패가 결정되면 이긴 편은 열광적으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고를 멘 채 승전가를 부르며 온 마을을 휩쓸고 돌아다닌다. 이때 부잣집에서는 닭죽과 술 등을 푸짐하게 내놓아 승리의 축하연이 베풀어지고 농악을 치며 밤새워 즐긴다.

고싸움은 놀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 일 년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농경 의식으로 전승되었다. 즉, 고싸움에 있어 동부는 ‘수줄’이라 하고 서부를 ‘암줄’이라고 하는데,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고줄을 만들 때도 암줄을 수줄보다 더 크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고싸움은 줄다리기와 마찬가지로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의식의 한 형태이며, 놀이를 통하여 마을사람들의 협동심과 단결력을 다지는 집단놀이로서 의의를 지닌다.

칠석마을의 전통은 단지 고싸움놀이라는 하나의 이벤트에 그치지 않는다. 정월이나 평소 음식 준비에 꼭 필요한 우물물을 길을 때도, 보이지 않는 규약이 있다. 물이 귀한 시절 우물 사용에도 질서가 있어서 생일 제사 등 행사가 있는 집 먼저 사용토록 배려한다.

가족을 잘 건사하고, 돕고 연대한다

고싸움놀이가 끝나고 음력 2월 1일은 ‘머슴의 날’과 ‘대종사’ 즉 마을 일을 결정하는 마을 총회를 마을회관에서 실시한다. 대종사가 열리는 날에는 어른들부터 상석인 남동쪽에 앉는다. 대종사는 수리계 관련 일, 마을 연중행사, 머슴 품삯, 상조계, 유친계 등과 관련된 사항을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그리고 결정된 사항들은 마을 공동체 구성원들의 규약으로서 철저하게 준수된다.

마을 면소재지에 ‘창고’ 즉 도창이 있어, 동답을 가지고 수리계 운영, 식리(대출, 장학) 사업 등 마을 공유 재산의 관리 운영을 자율적으로 한다.

칠석마을에서 나고 자란 주민들은 각자가 마을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이고 책임을 어떻게 다해야 하는지 저절로 인식하게 된다. 30대 청년은 어른과 선배들의 뜻을 존중하며 궂은일과 심부름을 열심히 수행한다.

40대 중반의 선배들은 실무 책임자로서 행사를 기획하고,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며, 원만하게 행사를 마무리하여 다음 후배에게 물려준다.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행사를 잘 준비하고 추진하는지 지켜보고 지도한다. 세대가 변하면 자신들의 역할도 달라짐을 또한 인식하고 있다.

필자는 칠석마을 공동체 전통과 고싸움놀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동체 형성에 관한 원리 두 가지를 발견하였다. 첫째는 가족에서 시작하여 마을공동체로 확장해 간다는 점이다. 가정이 든든하지 못하면 마을일에 참여할 수 없다. 취약한 가정이 있다면 마을에서 도와주고 보호해주는 것을 우선시한다.

둘째는 놀이와 축제로부터 시작하여 일과 경제 공동체로 발전해간다는 점이다. 함께 준비하고 땀 흘리는 놀이를 통해 ‘관계 만들기’가 먼저 이뤄지고 난 이후에 비로소 공동체 경제의 규약과 일을 논의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곳 마을이다

광주광역시 남구 노대동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공동체가 있다. 원래 논과 밭이었던 노대동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것은 불과 5~6년 전이다. 각양 각처에서 새롭게 이주해온 아파트 주민들이지만, 주민들이 스스로 매월마다 음악회를 열고, 마을 신문을 발행하고, 인문학 강좌를 통해서 이웃과 만나고 소통하기 위한 노력들을 한다.

이 같은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봉사활동은 올해 7월과 9월에 커다란 결실을 맺었다. 진남초등학교 학생과 주민 400명이 직접 손으로 타일 위에 그림을 그려서 삭막한 시멘트 옹벽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9월에는 마을축제를 개최하였는데 1,000개의 깃발이 나부끼는 인문학 마을 축제를 개최하였다. 주민과 청소년들이 직접 참여하여 깃발을 만들고, 부녀회가 음식을 제공하고, 노대마을 원주민들의 삶과 마을 유산을 사진전으로 전시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주민들이 직접 2개월여 동안 축제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여 매주 기획하고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마을도서관, 교회, 부녀회, 마을 기업, 상가 번영회 주민자치위원회 등 마을 내 다양한 단체와 조직이 직접 참여하여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축제를 성공리에 치렀다. 축제 당일 날 비가 오는 날씨에도 3,000명의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였고, 모 TV 전국 방송에 촬영하여 심층 보도되기까지 하였다.

필자는 광주에서 제법 잘 나가는(?) 고급아파트 밀집 지역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겨울방학 때 ‘청소년을 위한 마을 탐험’ 행사를 한 적이 있다. 삭막한 아파트와 쾌적하지 못한 도시 골목길 구석구석을 밟으며 마을 자원과 자랑거리를 찾아보고 둘러보았다.

또 봉사의 손길이 필요한 곳, 마을의 공공기관과 복지시설, 역사적 장소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고 사진으로 찍도록 하였다. 대형마트가 아니라 마을 가게에서 물건 구입하기, 마을 주민 인터뷰하기 등 과제를 청소년들에게 수행하도록 하였다.

청소년들이 명찰을 달고 재잘거리며 마을길을 촬영하고 돌아다니니까 삭막하고 조용한 골목길에 순식간 생기가 돌게 되었다. 무심히 지나가는 주민들은 궁금증을 갖고 아이들을 쳐다본다.

마을 어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낮선 아저씨가 말을 걸으면 무조건 피하라고 교육 받고 자라온 아이들이, 프로젝트 완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쭈뼛쭈뼛하며 등산복 차림의 어르신에게 다가가 ‘아저씨는 우리 마을에 사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등산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은가요?…’ 등질문과 인터뷰를 하도록 하였다. 무조건 경계의 대상이었고, 무뚝뚝할 것만 같았던 아저씨는 갑자기 표정이 부드럽고 환해지면서 너무도 자상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그 순간 아이들은 이전까지 알아왔던 세상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웃이 누구인지, 어떻게 이웃이 될 수 있는지를 경험하게 된다.

‘마을 탐험’ 행사를 마치고 참가자 설문조사를 받아보니, 아이들의 만족도는 100% 이상이었고 마을과 사람과 이웃에 대한 새롭게 알게 되었다고 응답하였다. 아침에 마을 탐험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아마도 엄마 때문에 억지로 참여한 것 같은) 불만으로 가득 찼던 아이들의 표정이, 환한 얼굴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같이 일하고 시간을 같이하면 커지는 것, 마을 공동체공동체 형성과 주거 문화의 관계성을 쉽게 정리하는 문제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3년 동안 광주시 외곽의 도농 복합 지역에서 마을 사업을 하면서 경험한 바로는, 주거 형태나 구조를 넘어 주민 생활과 관련 있는 것을 모든 것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주거 문화’가 공동체 형성을 좌우한다.

아파트가 되었건 자연마을의 단독 주택 단지가 되었건,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마을’이고 ‘공동체’이다. 그리고 마을 공동체는 주민들의 전체적인 의식을 반영하는 주거 문화의 표상이다.

골목길이나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 함께 음식을 나누며, 청소년들이 안심하고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마을과 아파트, 보육․생활쓰레기․층간소음․도서관 등 생활 문제를 함께 고민하면서 주민들이 스스로 풀어가고, 마을 축제와 행사를 함께 준비하고 치르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면서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고, 이곳(마을)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곳이라면 마을이건 아파트이건 바람직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을 공동체 사업은 마을 주민 스스로 지역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공동 노력하자는 운동이다. 지역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지역 주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서로 소통하며 노력해 나가야 한다. 마을 공동체는 주민들이 모여서 무엇이든 같이 일을 하고 시간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지고 커진다.

대동문화 79호 [2013 11,12월호]

임승호 광주광역시 마을기업 협의회 사무국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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